# 제 1장: 심연의 속삭임
엘도리아 마법 학원.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상아색 대리석과 금빛 장식으로 빛났고, 그 지붕 위로는 별자리 마법진이 하늘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학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곳은 마법사 지망생들에게는 꿈의 정점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강태민에게는, 이 눈부신 학원조차도 때로는 답답한 규칙과 예측 가능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강태민, 또 도서관 금지 구역 근처를 서성거리는 거야? 이번 달 벌점 경고가 몇 개인지 알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칼날 같은 목소리에 태민은 움찔하며 몸을 돌렸다. 역시나, 유리아였다. 새하얀 제복처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발 머리카락, 차가울 정도로 투명한 벽안은 언제나 학원의 규율을 정확히 지키고, 다른 이들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 유리아. 오랜만이네.” 태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유리아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오랜만? 지난주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마주치지 않았나? ‘엘도리아 역사 연구’라는 허울 좋은 핑계는 이제 그만둬. 도서관 최하층의 기록 보관소는 정식 인가 없이는 출입 금지야. 너 같은 C클래스 학생은 더더욱.”
유리아의 일갈에 태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C클래스. 실력으로 A, B, C로 나뉘는 엘도리아의 클래스에서 C는 사실상 ‘문제아’ 혹은 ‘잠재력 미달’의 낙인이었다. 물론 태민은 자신의 마법 실력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유리아처럼 모든 것을 숫자로만 재단하는 태도에는 반감이 있었다.
“그 ‘오래된 문서’라는 게 대체 뭔데, 태민아? 너 지난주부터 계속 그 얘기만 하잖아.”
그때,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장난기 넘치는 얼굴의 이한 선배가 나타났다. 3학년인 이한은 느슨하게 풀어헤친 제복 깃과 늘 한쪽 눈을 가리는 삐죽한 앞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다. 학원 내에서 ‘자유로운 영혼’ 혹은 ‘문제아 선배’로 통하는 그였다.
“이한 선배!” 태민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다.
“이한 선배, 또 강태민을 꾀어내는 겁니까? 금지 구역 출입은 최소 일주일 근신입니다.” 유리아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한은 피식 웃으며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어이쿠, 수석 유리아 양이 또 정의의 사도 코스프레를 하는군. 걱정 마. 우리 태민이는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야. 안 그래, 태민아?”
“네, 선배 말이 맞아요. 그 오래된 문서, 정말 궁금해서 잠이 안 와요.” 태민이 눈을 반짝였다. 이한 선배가 지난주에 흘린 ‘학원의 숨겨진 진실이 담긴 오래된 문서’라는 말은 태민의 호기심을 걷잡을 수 없이 자극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찾아볼까?” 이한이 씩 웃으며 태민의 어깨를 툭 쳤다. “도서관 최하층, 인가지역 끝의 일곱 번째 서가. 그 뒤에 숨겨진 문이 있어. 일반 마법으로는 안 열릴 거야.”
유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그런 건 학원에 없어! 만약 있다면… 그건 분명히 학원에서도 손대지 말라고 봉인한 금기일 거라고!”
“금기? 흐음,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겠어?” 이한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유리아를 바라봤다. “어차피 너희 둘은 나를 막지 못할 테니, 따라올 거면 따라와. 말리지 않을 테니까.”
태민은 유리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한 선배의 말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아는 한숨을 쉬더니, 결국 태민과 이한의 뒤를 따랐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감시라도 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사실은 그녀 역시 학원의 금기에 대한 은밀한 호기심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도서관 최하층의 기록 보관소로 향했다. 낡은 마법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가는 미세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겼다. 인가지역 끝, 일곱 번째 서가. 이한이 가리킨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서가와 다를 바 없었다.
“자, 이제 보여줄게. 엘도리아의 숨겨진 비틀린 면을.”
이한은 서가 중앙의 낡은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 책이 있던 자리의 빈 공간에 손가락을 대고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은 어떤 주문도, 마법진도 아니었다. 단지 아주 오래된 언어로 된 한 문장이었다. 이한의 손끝에서 옅은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서가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가가 좌우로 천천히 갈라지더니, 그 뒤에서 거대한 석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벽에는 복잡하고 기이한 문양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은 비정형적이고, 기존에 알려진 어떤 마법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건… 봉인 마법진이야.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오래된.” 유리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그녀는 한눈에 이 마법진이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래, 봉인. 하지만 누구를, 혹은 무엇을 봉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 이한이 마법진 중앙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마법진과 공명하며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밝혔다. 이내, 석벽 한가운데가 스르륵 열리며 검은 심연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음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존재가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냄새는 곰팡이와 흙먼지,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피비린내가 섞인 듯한 역겨운 악취였다.
“선배, 진짜 여기로 들어가려고요?” 태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본능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물론이지. 엘도리아의 진짜 역사는 여기에 숨겨져 있을 테니까.” 이한은 피식 웃으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어둠이 그의 모습을 삼켜버렸다.
유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위험했다. 학원의 규칙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저 미지의 공간은 분명 그녀의 모든 상식을 뒤엎는 무언가를 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한과 태민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마른세수를 하고는 태민을 재촉했다.
“강태민, 빨리 들어가.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태민은 유리아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발밑은 흙과 돌이 섞인 듯한 비탈길이었다. 몇 걸음 내려가자,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어둠이 그들을 완전히 감싸 버렸다.
“젠장, 아무것도 안 보여!” 태민이 마법으로 작은 광구를 만들어냈다. 희미한 빛이 주위를 밝혔지만, 어둠은 마치 그 빛마저 집어삼키려는 듯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통로는 좁고 구불구불했다. 벽은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이끼가 피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주기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기괴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습해졌다.
“이봐, 이한 선배. 여기 진짜 뭐 있는 거예요? 꼭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게 나는데…” 태민이 코를 킁킁거렸다.
“시체 썩는 냄새라… 그럴 수도 있겠지.” 이한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사라지고 묘한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며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석상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손발은 쇠사슬에 묶여 바닥에 박혀 있었다. 석상의 표면에는 오래된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마법진들은 흡사 석상의 고통을 영원히 가두려는 듯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각상이야?” 유리아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봉인된… 희생자?”
석상 주변의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했다. 이한은 광구 마법으로 벽을 비추며 천천히 글자들을 훑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건… ‘생명 마법을 이용한 실험 기록’…” 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대상은… 인간, 그리고 마법 생명체… 궁극의 마법을 찾기 위한… 금지된 시도…”
태민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생명 마법 실험. 그것도 인간을 대상으로. 엘도리아 학원은 인류의 평화와 마법의 올바른 발전을 주도하는 곳이 아니었던가?
“말도 안 돼… 학원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거야?” 유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얼굴은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석상 뒤편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감지되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푸른색, 붉은색, 보라색이 뒤섞인 불길한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끄윽… 끄으으윽…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하고, 짐승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지능적인 소리였다. 마치 고통과 분노, 절규가 뒤섞인 듯한 울음소리였다.
“젠장, 이건 또 뭐야!” 이한이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마나가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어둠 속의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신음 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 속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세 사람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분명히 생명체였다. 수많은 팔과 다리, 그리고 기괴하게 튀어나온 눈동자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그 몸에서는 끔찍한 악취와 함께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게… 엘도리아의… 금기…” 태민은 절규하듯 외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학원의 아름다운 외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순수한 악몽 그 자체였다. 그 순간, 그 괴물체의 모든 눈동자가 세 사람을 향해 동시에 번뜩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뒤를 막았던 비밀 통로가 ‘쾅!’ 소리와 함께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하 전체가 거대한 감옥처럼 울부짖는 듯했다.
“선배… 우리… 갇혔어요.” 유리아의 목소리가 완전히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괴물체는 이제 그들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는 이제 광기가 가득한 울음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버려진 던전이 아니었다. 엘도리아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살아있는 금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금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