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돔형 경기장은 고대 유적의 돌기둥과 첨단 홀로그램 스크린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바닥은 흠집 하나 없는 특수 합금으로 되어 있었으나, 곳곳에 남아있는 깊은 균열들은 이전 격전의 흔적을 웅변하고 있었다. 공기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무수한 시선이 아레나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침묵을 가르고, 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경기장에 발을 디뎠다. 그의 검은 도복 자락은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미세하게 펄럭였다. 그 어떤 존재감도 내뿜지 않는 듯, 흡사 공간의 틈새에 숨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손에 든 검은 흡사 밤하늘의 조각처럼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흑영검’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그는, 그 누구도 그의 출신과 본명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공허만이 남는다는 섬뜩한 소문만이 무성했다.
“……흑영검.”
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별호를 읊조렸다. 그 발음조차 조심스러웠다.
이윽고, 반대편에서 금속성의 푸른빛을 띠는 전투복을 입은 여인이 등장했다. 그녀의 어깨와 팔꿈치, 무릎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장갑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발걸음마다 바닥의 특수 합금판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강철나비’라 불리는 그녀는, 신기술 무림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운 기계 같으면서도, 맹렬한 투지로 불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아레나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흑영검은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는 검은 안광을 드리웠고, 강철나비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목의 장갑에 미세하게 푸른빛이 감돌게 했다.
싸움은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찾아왔다.
흑영검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존재는 인식의 영역에서 증발했다. 강철나비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의 뇌파와 연결된 신경 증폭 장치가 찰나의 반응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 주변에 미세한 중력장을 형성하며 흑영검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속도는 중력장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쉬이이잉—!
등 뒤에서 섬뜩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강철나비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오른손을 뒤로 뻗었다. 손목의 장갑에서 푸른색 에너지 방어막이 번개처럼 솟아올랐다.
파창!
방어막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푸른빛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처럼 튀었다. 흑영검의 검이었다. 검은 존재는 검 한 자루를 남긴 채 다시금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날에는 방어막에 부딪히며 생긴 미세한 금속 파편들이 박혀 있었다.
‘감지할 수 없어. 심장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의 기척은 허공과 다를 바 없어.’
강철나비는 숨을 골랐다. 그녀의 신경망은 흑영검의 움직임을 쫓아가기 위해 과부하 직전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이미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속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심지어 바닥의 미세한 먼지조차 그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완벽한 은신. 혹은… 차원 이동.
“그림자 같은 존재로군.”
강철나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음성은 전투복에 내장된 음성 증폭기를 통해 경기장 전체에 낮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철나비의 전투복 곳곳에 박힌 수정 같은 장치들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 공간의 기(氣) 흐름을 역으로 추적하는 파동이었다. 강력한 기류를 일으켜 흑영검의 은신을 강제로 깨트리려는 시도였다.
우우웅—!
경기장 전체의 공기가 압축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강철나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공간을 훑어내는 듯했다.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흑영검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는 경기장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치 그 모든 파동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강철나비가 말했다. 그녀의 손목 장갑에서 푸른 에너지의 날개가 돋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흑영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의 검날이 정면을 향하자, 주변의 모든 빛이 흡수되는 듯한 기묘한 암영이 드리워졌다.
강철나비는 한 발짝 내디뎠다. 그녀의 발밑에서 강력한 중력 반발장이 형성되며, 그녀의 몸이 마치 무중력 상태가 된 것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그 상태로 흑영검을 향해 돌진했다. 가속과 동시에 그녀의 주먹에서는 푸른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손목 장갑에 내장된 충격파 발생기가 만들어내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파괴적인 진동의 주먹이었다.
흑영검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강철나비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하기 직전, 그는 그제야 움직였다.
싸아아—
정지된 필름처럼 느리게, 하지만 실제로는 음속을 넘어선 속도로. 그의 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 강철나비의 모든 공격 경로를 막아섰다. 푸른 섬광의 주먹은 검은 검날에 부딪혀 터져 나갔고, 진동 에너지는 검에 흡수되는 듯 사라졌다.
“이럴 수가….”
강철나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파괴적인 진동 주먹은 어떤 강철도 종잇장처럼 구겨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저 검은… 그녀의 모든 에너지를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았다.
흑영검의 검이 회전하는 와중에, 찰나의 순간에 검 끝이 강철나비의 가슴께를 스쳤다.
스윽—
경미한 스침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철나비의 푸른빛 전투복에서 전기가 나간 듯 모든 빛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을 떠받치던 중력 반발장도 풀렸다.
털썩.
강철나비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전투복의 중앙, 심장 부근에 아주 미세한, 실오라기 같은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은 너무나 얕아서 피 한 방울 배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을 기점으로, 전투복의 모든 첨단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내 에너지 코어를… 어떻게….”
강철나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전투복은 외부의 물리적 충격은 물론, 모든 종류의 에너지 파동에도 저항하도록 설계된 최첨단 장비였다. 그런데 흑영검의 검은, 마치 전투복의 신경망을 찾아내 정확히 핵심 회로를 잘라낸 듯했다. 그것도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
흑영검은 강철나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여전히 어둠을 머금고 있었고, 그의 눈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승자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오만함이나 만족감도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강철나비는 필사적으로 손목의 장갑을 작동시키려 했지만, 이미 통신 자체가 두절된 상태였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흑영검을 올려다보았다.
“그대…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강철나비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여 떨렸다.
흑영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경기장 중앙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승자: 흑영검’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관중석에서는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모두가 얼어붙은 듯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오직 무거운 숨소리만이 공허한 돔형 경기장을 채웠다. 방금 그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상식과 기술의 경계를 넘어선, 압도적인 ‘무’의 발현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가, 이제 막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