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검이 꺾인 날
차가운 돌바닥에 기대어 앉은 몸은 이미 뼈마디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는 마법석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빛마저도 이 지옥 같은 공간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축축한 공기는 쇠와 피 냄새,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절망의 냄새로 가득했다. 이곳은 ‘망각의 심연’, 헬리오스 제국이 가장 흉악한 죄인들을 가두는 최악의 감옥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때 제국의 영웅이었던, 천상의 빛 아래 가장 빛나던 검이었던 카엘이었다.
손목과 발목을 묶은 마력 사슬은 나의 모든 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한때 강철처럼 단단했던 내 몸은 이제 한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앙상해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며칠? 몇 주? 아니면 몇 달? 시간의 감각조차 이곳에서는 희미한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에는 여전히 그날의 환영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 * *
그날은 제국의 수도, 황금성에 승전보가 울려 퍼지던 날이었다. 북부의 맹렬한 야만족을 격퇴하고 돌아온 나는 수많은 병사들의 환호와 시민들의 열렬한 박수갈채 속에서 성으로 들어섰다. 나의 어깨에는 제국 성기사단의 단장을 상징하는 푸른 망토가 펄럭였고, 허리에는 ‘여명의 검’이라 불리는 나의 보검이 빛나고 있었다.
“카엘! 우리의 영웅!”
“여명의 검이 돌아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심장을 뛰게 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군중 속에, 항상 내 곁을 지키던 한 남자가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단장님.”
에리온. 나의 오랜 친구이자 부관.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가진 그는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내가 뜨거운 불꽃이라면 에리온은 차가운 얼음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제국을 위해 싸워왔다. 그 누구보다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나는 나의 목숨보다 그를 믿었다.
“자네 덕분일세, 에리온. 자네의 전술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빠른 승리는 불가능했을 거야.”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에리온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와 함께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승전보고와 함께 다음 작전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눈부신 황금빛과 함께 황제 폐하의 위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나를 반기러 나와 있어야 할 대신들과 고위 마법사들이 모두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얼굴에도 미소 대신 깊은 근심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카엘. 오랜만에 보는군.” 황제 폐하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서리가 맺혀 있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북부의 위협을 제거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황제 폐하의 다음 말은 나의 심장을 꿰뚫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제국의 영광? 감히 네가 제국을 논하는가, 역적 카엘!”
내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역적? 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옆에 서 있던 에리온을 돌아보았다. 에리온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황제 폐하를 향해 있었고, 그 얼굴에는 내가 아는 온화한 미소 대신 차가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소신은 폐하께 평생을 충성해왔습니다!”
“닥쳐라! 네가 북부 원정 중에 야만족과 내통하여 제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황제 폐하의 외침과 함께, 뒤편에서 대신들이 우르르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내가 야만족 대장과 주고받았다는 위조된 서신들이 들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결백했다.
“이것은 모두 조작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짓을…!”
그때, 나의 억울한 외침을 가로막은 것은 에리온의 목소리였다.
“폐하, 단장님의 죄를 변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으나, 증거가 너무나 명백합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에리온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알던 친근함이나 믿음이 전혀 없었다.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만족감과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에리온… 자네 지금 무슨…?”
“단장님. 당신은 너무 순진했습니다. 제국의 힘을 탐하는 것은 비단 외부의 적들뿐만이 아니죠.”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했고,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연습해온 대사를 읊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자네 짓이었나?”
나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친구가, 나의 전부를 부수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에리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카엘. 결국 너의 순진함이 너를 파멸로 이끌었군. 네가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동안, 나는 제국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이제 너는 없고,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너의 ‘여명의 검’이라는 빛나는 이름도, 내가 가져가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현실 곳곳에 숨어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마법진이 황금성 전체를 감싸 안았고, 나의 몸을 묶는 강철 같은 힘이 느껴졌다. 내 안의 마력이 봉인당하고 있었다. ‘여명의 검’이 나의 허리에서 뽑혀 나가 에리온의 손에 들렸다. 그는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너의 빛나는 검은 이제 나의 것이 될 것이다. 너의 모든 영광도.”
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마력이 봉인당한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나의 눈앞에서 나의 충직한 기사들이 에리온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들의 피가 황금빛 알현실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나의 동료들, 나의 가족 같은 이들이 나를 배신한 친구의 손에 죽어갔다.
“에리온… 내가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나의 절규는 에리온의 비웃음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크윽…!”
환영에서 깨어난 나는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과 발목에 묶인 마력 사슬이 더욱 조여 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 다른 감정이 솟구쳤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이었다.
그때, 감옥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희미한 푸른빛이 더욱 짙어지며 한 인영이 들어섰다. 그는 나의 낡은 셔츠를 움켜쥐고 내 얼굴을 들었다. 깡마른 몸뚱이와 달리, 그의 눈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어이, 영웅 나리. 아직도 살아있었군.”
그는 이 감옥의 간수였다. 짐승 같은 눈빛을 한 남자는 손에 든 가죽 채찍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나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감히 에리온 폐하를 모함한 죄는 네 목숨 열 개로도 부족해.”
에리온 폐하. 그 이름이 나의 귓가에 박혔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제국은 이제 나의 친구, 아니 나의 원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의 이름 위에 그의 영광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간수는 다시 채찍을 들어 올렸다. “이제 곧 처형일이다. 마지막까지 발악이라도 해보지 그래?”
채찍이 날아오기 직전, 나는 간수의 손을 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내 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간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의 눈은 죽은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지옥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아.” 나의 목소리는 찢어진 짐승의 포효 같았다. “나는 살아남아… 네놈들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간수의 손아귀에서 나의 손을 놓자, 간수는 뒷걸음질 쳤다. 그가 본 것은 더 이상 초라한 죄인이 아니었다. 나락의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의 화신이었다.
“에리온… 네가 앗아간 모든 것을… 몇 배로 되갚아 줄 것이다. 네가 가진 그 모든 영광을, 지옥불 속에서 재로 만들 것이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알 수 없는 힘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나약한 죄수에 불과하지만, 이 절망의 끝에서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황금성을 불태우고, 에리온의 목을 베어, 나의 복수를 완성할 그날까지… 나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망각의 심연은 나를 삼키려 했지만, 그곳은 나를 집어삼키는 무덤이 아니라, 복수의 맹세를 새기는 제단이 되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나의 심장은 다시 뜨겁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피로 물든 검이 부러진 날, 나는 새로운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