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밀실의 연금술사
한낮의 태양은 가상 세계 아르카디아의 고도 위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뾰족한 첨탑과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즐비한 에테르나의 수도, ‘실버로드’의 서쪽 외곽, 연금술사 협회 본부의 웅장한 아치형 문이 평소와 달리 불길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보통이라면 약초 향과 끓어오르는 비커의 증기, 그리고 왁자지껄한 모험가들의 목소리로 활기찼을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카이 님?”
거대한 강철 문 앞에 선 청년, 리온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은 강철 문을 뚫고 내부를 엿보고 싶다는 듯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리온은 ‘어둠의 숲 탐사대’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어리숙한 조수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에테르나 경비대장 브론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갑옷은 번쩍였지만, 얼굴에는 복잡한 심경이 역력했다. “내가 이 성벽 안에서 삼십 년을 근무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마스터 엘라라가… 설마…”
카이는 그들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정적에 잠긴 연금술사 협회 본부의 가장 높은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뾰족한 지붕 아래, 창문 하나 없는 둥근 석탑. 그곳이 바로 대연금술사 엘라라의 개인 연구실이자, 지금은 밀실 살인 사건의 현장이었다. 그의 캐릭터명 ‘카이’는 굳이 길드를 밝히지 않아도 에테르나 전역에 통용되는 이름이었다. 살인 사건, 그것도 트릭을 꿰뚫어야만 하는 불가능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소환하는 ‘명탐정’이자, 동시에 ‘유저’ 강하은의 아바타였다.
“말이 되냐고요? 글쎄요.”
카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얇은 안경 너머로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아르카디아는 어디까지나 ‘게임’입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은 여기서도 불가능하죠. 단, ‘게임 시스템’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요.”
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경비대장님의 말씀은…”
브론이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마스터 엘라라의 연구실은 이 협회 본부의 최상층 탑입니다. 입구는 오직 단 하나의 강철 문. 그 문은 마스터 엘라라가 직접 고안한 ‘아르카인 자물쇠’로 잠겨 있었습니다. 오직 안에서만 조작 가능한 레버식 잠금장치죠. 창문은 높고 좁아, 성인 남성은 고사하고 아이조차 통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엘라라가 사망한 시간 내내, 우리 경비대원들이 밖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했습니다. 밀폐된 공간입니다.”
“밀폐라…” 카이는 턱을 쓸었다. “음… 좋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죠.”
브론이 열쇠를 꺼내 잠금장치를 풀었다. 육중한 강철 문이 삐걱이며 열리자, 안에서는 짙은 약재 향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리온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연구실 내부는 원형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작업대와 비커, 시험관, 영롱한 빛을 내는 광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대 앞에, 대연금술사 엘라라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푸른 로브는 작업대 위에 흩뿌려진 파편들 위에 불안하게 얹혀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짙은 검은색의, 마치 불에 그슬린 듯한 원형의 상흔이 선명했다.
“젠장…” 브론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 “역시나…”
카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겨 엘라라의 시신에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시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근접해서 관찰했다. 리온은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초조하게 서성였다.
“특이점은 없군. 시스템이 기록한 사망 원인, ‘강력한 마법 공격으로 인한 심장 파괴’가 맞을 겁니다.” 카이가 말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곳을 빠져나갔느냐는 거죠.”
그의 시선은 엘라라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지는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다 놓친 듯한 자세였다.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주변의 온갖 복잡한 연금술 장비들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바닥의 먼지 하나, 벽의 미세한 균열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움직였다.
“경비대장님.” 카이가 브론을 불렀다. “사건 현장에 다른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어, 이곳 연구실로 통하는 비상 마법진이라든가, 벽에 설치된 비밀 통로 같은 것 말입니다.”
브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스터 엘라라의 결벽증은 유명합니다. 이 방은 본인이 직접 점검하고 봉인했습니다. 게다가 이런 곳에 은밀한 마법진이 있었다면, 시스템 알림으로 즉시 감지되었을 겁니다. 이곳은 아르카디아 내에서도 보안 등급이 가장 높은 구역 중 하나입니다.”
카이는 브론의 말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아르카디아’의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 ‘버그’성 침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강철 문으로 향했다. 그는 문 안쪽의 ‘아르카인 자물쇠’를 손으로 더듬었다. 복잡한 룬 문양이 새겨진 강철 레버가 ‘잠김’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 레버는 안에서만 조작이 가능하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작하려면 최소한 일반 성인 남성 정도의 힘이 필요합니다. 꽤 뻑뻑합니다. 연약한 여성인 엘라라 마스터조차 쉽게 다루기 어려워했습니다.” 브론이 설명했다. “아마 엘라라 마스터가 직접 잠갔거나, 아니면 범인이 엘라라 마스터를 살해한 후 직접 잠갔을 겁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요? 미스터리입니다.”
“미스터리라…” 카이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는 자물쇠 근처 바닥을 응시했다. 바닥에는 얇게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유독 자물쇠 바로 앞, 지름 한 뼘 정도 되는 원형 공간만은 먼지가 희미하게 쓸린 듯한 흔적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 작고 단단한 물체가 그곳에 잠시 놓여 있었다가 사라진 것처럼.
“음…” 카이는 손가락으로 그 흔적을 쓸어보았다. 그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는 다시 엘라라의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시신 주변 바닥을 더욱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엘라라의 작업대 아래쪽, 바닥과 맞닿는 부분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금속 조각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금속 조각과는 달리, 가장자리가 둥글게 마모되어 있었고, 표면에는 희미한 마법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카이 님?” 리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이는 그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엘라라 마스터가 다루던 재료는 아닙니다. 이건 ‘골렘 파편’이군요. 그것도 제법 오래된, 하지만 동시에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는…”
그의 눈은 다시 강철 문 근처의 바닥으로 향했다. 아까 보았던, 먼지가 쓸린 듯한 원형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은 문의 바로 안쪽, 정확히는 이 ‘아르카인 자물쇠’ 아래, 그리고 발이 닿는 높이의 ‘압력 감지판’이 설치된 곳과 일치했다.
“압력 감지판…” 카이가 중얼거렸다. “이 자물쇠는 압력 감지판이 눌려 있으면 작동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브론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이중 보안’ 장치입니다. 혹시 모를 내부자의 강제 감금을 방지하기 위해, 문 안쪽의 압력판이 일정 무게 이상으로 눌려 있으면 자물쇠가 잠기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지금 압력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적’은 아니죠.”
카이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의 눈이 빛났다. “알겠습니다. 이 밀실의 트릭을 깨는 방법을.”
리온과 브론은 숨을 죽였다.
“범인은 엘라라 마스터를 살해했습니다.” 카이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그리고 이 밀실을 ‘잠그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핵심은 ‘잠그고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범인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리온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간단합니다. 범인은 살해 직후, 먼저 이 아르카인 자물쇠 레버를 ‘잠김’ 상태로 돌렸습니다.” 카이가 강철 문 안쪽의 레버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때, 문 안쪽의 ‘압력 감지판’은 여전히 눌려 있는 상태였을 겁니다.”
브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누가? 우리 대원들은 엘라라 마스터가 쓰러진 이후로는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카이가 엘라라의 작업대 아래에서 발견한 ‘골렘 파편’을 내밀었다. “이 파편의 주인, 즉 범인이 소환했던 ‘소형 골렘’이 압력판을 누르고 있었던 겁니다. 소형 골렘은 작지만 특정 무게를 가집니다. 그리고 소형 골렘의 무게는 압력판을 잠시 동안 활성화 시키기에 충분했겠죠.”
리온이 숨을 들이켰다. “그럼… 범인이 자물쇠를 잠그는 동안에도 문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는 건가요?”
“정확합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시스템은 ‘압력판이 눌려 있으면 잠기지 않음’이라는 규칙을 철저히 따릅니다. 하지만 범인은 그 규칙을 ‘이용’한 겁니다. 잠금 레버를 돌렸지만, 압력판이 눌려 있었기에 문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일종의 ‘오류 상태’에 놓여 있었겠죠. 문은 겉으로는 잠긴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브론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리고 범인은 그 찰나의 ‘오류 상태’를 틈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밖으로 나온 범인은 ‘소형 골렘을 소환 해제’ 했을 겁니다. 골렘이 사라지자, 압력판은 더 이상 눌려 있지 않게 되고, 시스템은 비로소 ‘압력판이 눌려 있지 않으므로 잠금 가능’ 상태로 인식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문은 ‘안에서 잠긴’ 완전한 밀실 상태가 되는 거죠.”
카이의 설명에 리온과 브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불가능한 밀실’이 얼마나 치밀하고 기만적인 트릭이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카이 님, 골렘은 아무리 소형이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텐데요? 아니면 소환 해제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게 발생했을 텐데, 경비대원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리온이 의문을 제기했다.
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간단합니다. 이 연구실에는 연금술 재료들이 잔뜩 있지 않습니까? 특히 ‘은은한 기운의 연막탄’ 같은 것 말이죠. 살해 직후, 범인은 연막탄을 터트려 시야를 가린 겁니다. 그리고 그 연막 속에서 소형 골렘을 소환 해제하고, 유유히 사라진 거죠.”
브론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게임 시스템을 그렇게까지 이용할 줄이야.”
“게임 시스템은 규칙입니다. 그 규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교묘하게 이용하느냐가 이런 트릭을 가능하게 만들죠.” 카이는 다시 엘라라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 어떤 치밀한 트릭도, 언제나 작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소형 골렘의 파편, 그리고 압력판 위의 미세한 흔적, 그리고 시스템 로그에 남은 찰나의 ‘잠금 상태’ 변화까지.”
카이는 안경을 살짝 치켜 올렸다. 밀실은 깨졌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의 명탐정으로서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