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에픽 하이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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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적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세상의 근원이 흔들리고, 존재의 경계가 흐려질 때, 오직 가장 순수하고 강대한 무(武)의 의지만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의지를 가려내는 자리가 바로, 오대 명문과 강호의 은둔 고수들이 모여 겨루는 ‘현천비무제(玄天比武祭)’였다.

현천비무제. 그 이름만으로도 천하의 무림인들을 설레게 하는 이 대회가 올해는 더욱 비장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백 년 전 봉인되었다던 ‘마신봉(魔神峰)’의 균열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검은 기운이 하늘을 찢고 솟아오르며 온 천지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마기는 점차 강호 전체를 좀먹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천산(天山)의 봉우리 중 가장 웅장하고 신비로운 ‘영겁의 투기장’이었다. 거대한 암석들이 자연적으로 솟아올라 마치 용의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중앙에 자리 잡은 원형 투기장은 수많은 무림인들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흰 구름이 발아래 깔리고,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옥빛 계곡을 건너온 강호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영겁의 투기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검푸른 도포를 입은 한 사내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진. 어느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무사로, 강호에는 그의 이름보다는 ‘무영검(無影劍)’이라는 별호가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의 검술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나이는 스물 초반으로 보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오랜 풍파를 겪은 듯한 깊은 고독과 함께,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보아라! 저자가 무영검 하진이 아닌가?”
“과연… 듣던 대로군. 저 검은 도포는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일까?”
“정마대전(正魔大戰) 이후 처음 열리는 현천비무제에 저런 괴물이 끼어들 줄이야.”

수많은 시선이 하진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그의 등 뒤에는 빛바랜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는데, 그 검은 너무나 평범해 보여 아무도 그것이 그토록 날카로운 검기가 뿜어져 나오는 원천이라고는 믿지 못했다.

드디어 대회가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우렁찬 함성이 영겁의 투기장을 가득 메웠고, 대회 운영을 맡은 ‘천무맹(天武盟)’의 맹주, 구천무(九天武)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함께 세상의 근심이 어려 있었다.

“강호의 모든 영웅들이여!” 구천무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지금 우리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마신봉의 균열은 이 세상 모든 생명의 근원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현천비무제의 승자는, 단지 천하제일의 칭호를 얻는 것을 넘어, 이 재앙을 막아낼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그의 말에 투기장은 숙연해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예선전이 시작되고, 무림 고수들의 현란한 무공이 펼쳐졌다. ‘소림(少林)’의 나한권, ‘무당(武當)’의 태극검법, ‘화산(華山)’의 매화검법, ‘곤륜(崑崙)’의 벽력장 등 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흐르는 무공들이 영겁의 투기장을 수놓았다.

하진은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의 첫 상대는 ‘개방(丐幫)’의 장로 중 한 명인 칠성개(七星丐)였다. 칠성개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장풍과 곤법을 구사하며 하진을 압박했다.

“크하하! 이 늙은이의 취팔권(醉八拳) 맛 좀 보거라, 애송이!”

칠성개의 주먹이 마치 번개처럼 하진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하진은 한 걸음 물러서며 허리춤의 검을 뽑지 않고, 맨손으로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미약한 내력은 칠성개의 주먹을 감싸더니,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그의 힘을 흡수하는 듯했다.

“이… 이럴 수가!” 칠성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주먹은 허공에서 멈춰 선 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하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마치 물 흐르듯 칠성개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겉보기엔 아무런 충격도 없어 보였지만, 칠성개는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투기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승자, 하진!” 심판의 목소리가 울리고, 투기장은 술렁였다. 검을 뽑지도 않고 개방의 장로를 쓰러뜨리다니. 무영검의 실력은 소문보다 훨씬 뛰어났다.

대회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특히 ‘혈마교(血魔敎)’의 잔존 세력이라 알려진 ‘흑룡방(黑龍幇)’의 방주, 흑영(黑影)은 나타나는 족족 상대를 잔혹하게 제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의 무공은 기괴하고 사악했으며, 그를 상대한 무림인들은 마치 혼이 빨린 것처럼 기력을 잃었다.

하진은 묵묵히 흑영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함께 어떤 연민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준결승전.
하진의 상대는 ‘청월문(靑月門)’의 문주, 서린(瑞麟)이었다. 서린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한 자태로 검을 다루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검술은 ‘빙결검법(氷結劍法)’이라 불리며,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상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영검 하진, 그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서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새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하지만 천하의 운명이 걸린 자리, 누구도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진이 짧게 답했다. 그의 손은 이미 검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서린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 기운이 투기장 바닥을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였다.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한기가 하진을 향해 돌진했다. 하진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았다. 그는 몸을 틀어 한기를 피했고, 그 움직임은 마치 바람에 실린 잎새처럼 가벼웠다.

“어째서 검을 뽑지 않는 것이오? 비무를 모욕하는 처사인가요?” 서린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당신의 검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베는 것은, 무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진의 낮은 목소리가 투기장에 울렸다.

서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검법에 깃든 깊은 내면의 아픔을 알아본 이는 하진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을 떨쳐내고 더욱 맹렬하게 공격했다. 수십 개의 얼음 칼날이 하진을 향해 쏟아졌고, 투기장 전체가 빙하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때였다. 하진의 검집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검이 뽑히는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다. 무영검. 그 이름처럼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칼날은 마치 그림자처럼 서린의 모든 공격을 꿰뚫고, 그녀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 서린의 검은 공중에서 멈춰 섰다. 그녀의 목에 닿은 검기는 차갑지만,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스스로의 내면에 갇혀 있습니다. 그 얼음을 깨부수지 못하면, 마신봉의 마기를 막아낼 수 없을 겁니다.” 하진의 말이 서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서린은 검을 떨어뜨렸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승자, 하진!”

결승전.
하진의 상대는 흑룡방의 방주, 흑영이었다. 흑영의 등장에 투기장은 다시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의 주변에는 검은 마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그의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하하하! 결국 여기까지 왔군, 무영검! 너의 그 시시한 연민이 내 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흑영이 사악하게 웃었다. “이 세상은 이미 마기의 먹이가 될 운명이다! 현천비무제 같은 우스꽝스러운 쇼로 막을 수 있을 줄 아느냐!”

“마기는 당신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진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무영검이 쥐여 있었다. “당신의 증오가 마기를 불러들였습니다.”

“닥쳐라!” 흑영은 분노했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투기장의 바닥이 갈라지고, 주변의 암석들이 부서져 내렸다. ‘천마혼(天魔魂)!’ 흑영의 무공은 사람의 혼을 잠식하는 사악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진은 마기가 휘몰아치는 중심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순수한 ‘기(氣)’ 그 자체였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흑영의 마기를 가르고 들어갔다.

“이… 이럴 수가!” 흑영은 경악했다. 그의 마기가 하진의 검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이었다.

하진의 검은 흑영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막상 닿기 직전, 그의 검은 방향을 틀어 흑영의 검을 쳐냈다. ‘챙!’ 하는 맑은 금속음이 투기장을 울렸다. 흑영의 검은 산산조각이 났다.

“네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하진이 흑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증오와 마기를 버리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기회가.”

흑영은 무릎을 꿇었다. 패배의 분노보다는, 하진의 검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순수함에 압도당한 듯했다. 그의 몸을 감싸던 마기가 서서히 걷히고,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승자, 하진!” 심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영겁의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환호성 대신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하진은 천하제일무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기쁨도, 승리의 만족감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부서진 흑영의 검 조각을 바라보았다. 마신봉의 균열은 아직 닫히지 않았고, 세상의 운명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구천무 맹주가 단상으로 다가와 하진의 어깨를 잡았다.
“수고했다, 무영검. 이제, 세상의 운명이 자네의 손에 달렸다.”

하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검은 마기가 솟구치는 마신봉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강렬한 결의가 타오르고 있었다.
“저는 단지 제 길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의 운명이 저를 불렀다면, 응해야지요.”

그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의 운명을 짊어진 채, 홀로 검은 산을 향해 걸어가는 한 명의 무사였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의 등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거대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