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핏빛 서막 (血色序幕)

밤은 깊고, 칠흑 같았다. 서슬 퍼런 달이 구름 뒤에 숨어버린 강호의 밤은 언제나 피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비린내는 유난히 짙었다.

단우혁은 낡은 두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흑룡표국(黑龍鏢局)의 은밀한 금고가 위치한 건물을 응시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문가의 차남,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밝았던 청년이었다. 재능 또한 출중하여 무림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 불렸다.

*천무진.*

그 이름 석 자가 단우혁의 뇌리에서 불타는 인(印)처럼 새겨졌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믿고 의지했던 벗이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무공을 연마하며, 강호의 정의를 논했던 유일한 존재.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처절한 기만이었을 뿐. 천무진의 칼날은 가장 믿었던 순간, 가장 치명적인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때의 고통, 배신감, 그리고 절망은 단우우혁을 삼켜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수 년의 세월 동안, 단우혁은 생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이를 갈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내며, 부러진 뼈를 붙이고 찢어진 근육을 다시 이었다. 맹독을 약으로 삼아 몸을 단련했고, 절망을 연료 삼아 무공을 갈고닦았다. 그의 검은 무너진 신념 위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더 이상 정의를 논하지 않고, 오직 파괴만을 추구하는 그림자 검이 되었다.

“크으읍….”

깊은 숨을 들이쉬자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흉터로 뒤덮인 손을 들어 올리자, 손목에 감긴 낡은 천 조각 아래로 끔찍한 자상들이 불거졌다. 이제는 덧대어진 근육과 비틀린 뼈만이 남아있을 뿐, 예전의 매끈한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은 고통의 증명이었고, 복수의 그림자 그 자체였다.

건물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단우혁은 그림자처럼 지붕을 타고 움직였다. 밤바람이 그의 검은 도포 자락을 흔들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흑룡표국의 경비는 삼엄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낡은 울타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쉭! 퍽!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두 명의 경비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목덜미를 베는 대신, 단우혁은 그들의 기혈을 틀어막아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단우혁’이라는 존재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그는 천무진이 자신의 부하들을 찾아다니며 불안에 떨어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고 문 앞에 다다르자, 거대한 쇠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문고리에는 정교한 자물쇠들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단우혁의 눈에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얇고 긴 강철침을 꺼냈다.

사각, 사각. 딸깍.

기이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들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신들린 듯 정확하고 빨랐다. 불과 몇 호흡 만에, 굳게 잠겨 있던 쇠문이 스르륵 열렸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둡고 축축했다.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묵직한 비릿한 쇠붙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는 낮게 매달린 기름 등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우혁은 안으로 들어섰다. 금은보화와 귀금속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한쪽에 놓인 나무 상자 속에는 귀한 약재들이, 또 다른 상자에는 각종 보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천무진이 흑룡표국을 통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흥.”

단우혁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걸렸다. 그에게 이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곳에 물건을 훔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금고 안쪽 벽면에 촘촘히 박혀있는 묵직한 쇠 상자들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견고하고 비밀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는 상자 하나.

단우혁은 그 상자 앞에 섰다. 상자 표면에는 정교한 봉인술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 또 다른 기문진(奇門陣)이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도적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난이도였다. 하지만 단우혁에게는 달랐다. 그는 천무진과 함께 어릴 적부터 수많은 고서들을 탐독했고, 봉인술과 기문진에 대한 지식 또한 누구보다 깊었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봉인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풀어내듯, 복잡한 문양들이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내공이 손끝을 통해 봉인으로 흘러들어가자, 찌르르르 하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봉인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마침내 쇠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예상대로 하나의 서찰과 작은 옥패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서찰은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옥패는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단우혁은 서찰을 꺼내들었다. 봉인마저도 심상치 않았던 이 서찰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천무진의 치명적인 약점이거나, 그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일 터.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차가운 칼날이 등 뒤에서 벼락처럼 덮쳐왔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숙련된 고수라면 이미 당하고도 남았을 일격. 하지만 단우혁은 달랐다. 그의 등골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그림자는 그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파앗!

단우혁은 몸을 틀며 공격을 피했다. 칼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옷자락을 찢었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스치자마자,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변했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사내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 냄새를 머금은 듯한 검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단검에서는 미약하지만 독특한 살기가 느껴졌다. 흑룡표국의 일반 경비가 아니었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흑룡표국의 금고를 침범하다니!”

사내가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은 단우혁의 손에 들린 서찰과 옥패를 향해 있었다. 마치 저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듯한 집착이 느껴졌다.

단우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 년간 죽음의 고통 속에서 연마한 핏빛 살기였다. 그의 그림자 검이 허리춤에서 스르륵 뽑혀 나오자, 금고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감히… 흑룡표국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자는 죽음뿐이다!”

사내가 다시 공격해 왔다. 그의 단검은 번개처럼 빠르고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단우혁의 눈에는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그는 이미 죽음을 수없이 겪어낸 자였다. 죽음을 피하는 법이 아니라, 죽음을 다루는 법을 깨달은 자였다.

쉬이이익! 쨍그랑!

단우혁의 검이 사내의 단검을 쳐냈다. 금속성 마찰음이 금고 안에 울려 퍼졌다. 사내의 손에서 단검이 튕겨 나갔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서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군. 하지만 저것만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사내는 빈손으로 단우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톱이 길게 늘어나며 독사의 발톱처럼 변했다. 손끝에는 검푸른 독기가 서려 있었다. 흑룡표국에는 외부의 비밀 병기가 고용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직접 대면하니 그들의 광기는 예상보다 깊었다.

“천무진은… 이딴 하찮은 개들을 키우고 있었군.”

단우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눈동자에 더 이상 인간적인 감정은 없었다. 오직 복수심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파앙!

단우혁의 검이 순식간에 사내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면에서 맞붙는 대신, 그는 사내의 독기를 피해 옆구리를 노렸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가 사물에 스며들 듯이 부드럽고 잔혹했다.

“크헉!”

사내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고통도 잊은 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단우혁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다. 독기가 그의 손톱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쓸데없는 발버둥이다.”

단우혁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검이 사내의 가슴팍을 정확히 꿰뚫었다. 철퍼덕! 피 튀기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한 채 서서히 굳어갔다.

단우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살기는 여전히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사내의 시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옷자락에서 작은 문양이 새겨진 헝겊 조각이 발견되었다.

*독혈문(毒血門).*

단우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천무진이 독혈문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강호에서 가장 음험하고 잔인한 독문 무공을 사용하는 사파 집단. 그의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그는 사내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벽 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쇠 상자 속의 서찰과 옥패를 응시했다. 독혈문의 고수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 그 가치는 상상 이상일 터.

단우혁은 서찰을 펼쳤다. 안에는 정교하게 쓰여진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의 눈이 글자들을 훑어 내려갔다.

*‘…천가(天家)의 숨겨진 보물, 그리고 그 계승에 대한….’*

단우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가. 천무진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천가의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 그리고 그 음모의 핵심에 천무진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배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손이 저절로 옥패로 향했다. 옥패는 손에 쥐자마자 온화한 기운을 뿜어냈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이것은… 천가의 가주만이 지닐 수 있는 신물(信物)이었다.

“천무진… 네놈이 이런 것까지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단우혁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서찰과 옥패를 품에 소중히 간직했다. 이제 그의 복수극은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섰다. 천무진이 꾸미는 거대한 계략의 실타래를 풀어야만 했다.

그는 쓰러진 독혈문 고수의 시신 옆에 자신의 그림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검 끝에 찢어진 도포 조각을 매달았다. 도포 조각에는 그의 가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전 사라졌다고 알려진, 하지만 이제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문양.

그것은 단순한 도포 조각이 아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망자(亡者)의 메시지였다.

금고 문을 닫고 다시 지붕으로 올라선 단우혁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뒤에 숨었던 달이 다시 고개를 내밀며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서늘한 달빛보다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천무진. 네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가장 밑바닥부터 파괴해 주마.*

그는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호에 새로운 피바람이 불어올 서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