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짙게 깔린 폐허 도시의 스카이라인 사이로,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마지막 햇살을 먹고 반짝였다. 미나는 허물어져 가는 고층 건물 잔해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등에 짊어진 낡은 배낭은 깡통 몇 개와 정체 모를 부품들로 묵직했다.
“젠장, 오늘은 국물도 없네.”
미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중얼거렸다. 어제 찾은 곰팡이 핀 에너지바 한 조각이 전부였다. 도시 곳곳을 뒤져봤지만, 멀쩡한 보급품은 씨가 말랐다. 이곳저곳 부서진 채로 기괴하게 휘어져 있는 간판들, 도로를 뒤덮은 야생 덩굴들, 그리고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울음소리만이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였다.
목표는 한때 대형 마트였던 곳. 지붕은 반쯤 날아갔지만, 지하 창고는 아직 온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마트 입구는 잔해와 덩굴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미나는 낡은 갈고리와 밧줄을 꺼내 능숙하게 건물 외벽을 타고 올랐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서 웬만한 특수부대원 뺨치는 실력을 갖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삐걱거리는 철골을 밟고 옥상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아래로 향하는 금속 계단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발밑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지하 창고는 어두웠지만, 휴대용 랜턴을 켜자 희미하게 그 내부가 드러났다. 곰팡이 냄새,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선반들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은 오래된 서류 뭉치나 파손된 물건들이었다.
“하, 역시 이럴 줄 알았지.”
한숨을 쉬며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던 미나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멈췄다. 녹슨 철문 하나.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낡은 종이 포장지에 싸인 통조림 캔 세 개가 얌전히 들어 있었다. 육포, 복숭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튜’ 통조림.
“오오! 맙소사! 스튜라니! 이것은 신이 주신 선물… 컥!”
그 순간,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휙 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미나와 똑같이, 아니 미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랜턴을 들고 있는 남자였다. 검은색 후드티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바지.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와 깊게 눌러쓴 모자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망치였다. 그것도 아주 묵직해 보이는.
남자는 통조림 상자를, 정확히는 스튜 통조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내 거거든? 먼저 발견했어.” 미나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못 들었어? 선착순, 알지? 내가 먼저 열었잖아!”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봐! 좀 말 좀 해봐! 강도야? 강도면 좀 귀엽게라도 해봐!”
그때, 남자가 천천히 망치를 들었다. 미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싸우자는 거야 지금?”
남자는 망치로 바닥을 ‘툭’ 하고 한 번 쳤다.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리고 아주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튜… 양보해라.”
미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양보해라’라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지금 며칠 굶었는 줄 알아? 복숭아 통조림은 양보할게! 육포도! 근데 스튜는 안 돼!”
남자는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가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날카로운 콧날과 단단하게 다문 입술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의 눈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스튜… 중요해.”
“나한테도 중요해! 내가 죽기 직전에 엄마 이름 다음으로 외칠 게 바로 스튜 통조림이라고!”
그때, “크르릉…” 하는 낮고 위협적인 소리가 지하 창고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미나와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마치 별처럼 깜빡였다.
“젠장, 저 빌어먹을 쥐새끼들!” 미나가 이를 갈았다.
평범한 쥐가 아니었다. 핵폐기물이라도 퍼먹었는지 덩치는 고양이만 하고, 이빨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돌연변이 쥐떼였다. 놈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망치를 고쳐 잡았다.
“뒤로 물러서.” 그가 짧게 말했다.
“내가 왜? 내가 저런 쥐새끼들 때문에 스튜를 포기할 줄 알아?”
“위험하다.”
“위험한 거 나도 알아! 근데 내 스튜는 더 위험해! 쟤들한테 빼앗기면 나 울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나는 이미 재빠르게 배낭에서 낡은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생존자였다. 징징거려도 싸울 때는 싸웠다.
쥐떼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미나는 앞장서서 달려드는 쥐 한 마리의 머리를 파이프로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놈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때, 남자가 움직였다. 그는 망치를 휘둘러 달려드는 쥐들을 마치 야구 방망이로 공을 치듯 날려 보냈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고, 힘이 넘쳤다. 쥐들은 맥없이 벽에 부딪히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미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와, 저 인간은… 람보인가?’
하지만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른 쥐들이 미나의 다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으악! 저리 가! 내 옷 물어뜯지 마! 이거 귀한 거야!”
미나가 파이프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숫적 열세는 너무나 분명했다. 한 마리가 미나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괜찮아?” 남자가 미나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드물게 걱정이 섞여 있었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이 스튜 도둑놈아! 내 다리도 물어뜯겼다고!”
“이리 와.”
남자는 미나의 팔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마치 벽처럼 굳건히 서서 망치를 휘둘렀다. 쥐들은 그의 망치에 의해 사정없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미나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스튜를 놓고 싸우던 사이라고!
그렇게 한바탕 전투가 끝나자, 바닥에는 수많은 돌연변이 쥐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쥐들의 피와 먼지가 뒤섞여 퀴퀴한 냄새가 더욱 심해졌다.
“휴… 다 죽었나?” 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미나의 다리 쪽을 힐끗 보더니 배낭에서 낡은 의료 키트를 꺼냈다. 소독약을 뿌리고 거친 붕대를 감아주는데, 그의 손길이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어… 고마워.” 미나가 어색하게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아까 스튜 양보 안 한다고 했지?” 미나가 슬며시 상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랜턴을 들어 상자를 비췄다. 그리고는 스튜 통조림을 집어 들었다. 미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설마… 그걸 혼자 다 먹으려고?”
남자는 스튜 통조림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망치로 캔 뚜껑을 능숙하게 땄다. 그리고는 스튜 통조림을 미나에게 내밀었다.
“…응?” 미나가 눈을 깜빡였다.
“반.” 남자가 말했다.
미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 아니, 저 인간은 강탈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반… 반이라니? 내가 다친 것 때문에 동정표 같은 건가?”
“아니.”
“그럼 뭔데?”
“둘이 먹기엔… 애매해.”
미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딱딱한 말투로 ‘애매해’라니.
“그래서 반만 먹으라고?”
“나머지 반은 나.”
“치사하게!”
미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스튜 통조림을 받아 들었다. 따뜻하고 진한 스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미나는 스푼 대신 손가락으로 스튜를 퍼먹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너는… 안 먹어?” 미나가 그에게 나머지 반쪽을 내밀었다.
“잠시만.”
남자는 자기 배낭에서 작은 휴대용 버너와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는 아까 미나가 포기했던 복숭아 통조림과 육포 통조림을 꺼냈다. 능숙하게 따서 냄비에 부었다.
“뭐 하는 거야?” 미나가 물었다.
“스튜… 부족하다.”
“응? 아니, 그걸로 스튜를 만드는 거야 지금? 복숭아랑 육포랑…?”
남자는 불을 켜고 복숭아와 육포를 끓이기 시작했다. 미나는 기겁했다.
“세상에, 최악의 조합 아니야? 복숭아 육포 스튜라니! 그건 재앙이야! 차라리 쥐 시체를 먹지!”
“단백질, 당분… 섞으면… 열량.”
“아니, 너 설마… 그 전에 복숭아 육포 스튜를 먹어본 적 있어?”
“…아니.”
미나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생존 방식을 터득한 걸까. 그리고 왜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끔찍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걸까.
잠시 후, 냄비에서 묘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달콤한 복숭아 향과 짭짤한 육포 냄새가 뒤섞여, 마치 상한 과일과 고기를 동시에 먹는 듯한 불쾌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웩! 야! 냄새부터 죽음인데? 이건 고문이야!”
“먹어봐.” 남자가 숟가락으로 한 숟갈 떠서 미나에게 내밀었다.
미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사양! 그건 네 거야! 다 먹어! 아니, 너나 먹으라고! 내 옆에서 그러지 마! 구역질 나!”
남자는 미나의 말을 무시하고 조용히 복숭아 육포 스튜를 한 숟갈 떠먹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마치 아무 맛도 안 나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진짜 대단하다 너… 와, 존경스럽네.” 미나가 혀를 내둘렀다.
“넌… 내 스튜 덕분에 살았어.” 남자가 갑자기 미나의 텅 빈 스튜 캔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아니, 내가 내 목숨 걸고 구한 거거든? 그 쥐새끼들 때문에 반이나 날아간 거잖아!”
“반… 살았다.”
“아니, 내가 너 때문에 쥐한테 물렸거든?”
황당한 말싸움이 오고 가던 그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딜? 나 여기 더 뒤져볼 건데.”
“위험하다.”
“너 혼자 가! 난 내 갈 길 갈 거야!”
그때, 미나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방금 먹은 스튜 반 캔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배낭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이번에는 큼지막한 건포도 한 봉지였다.
“이건… 뭔데?” 미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폐건물에서 찾았다.”
“와… 진짜… 너 보부상이야? 뭐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
“생존.”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그는 건포도 봉지를 미나에게 던져주었다. 미나는 얼떨결에 받았다.
“같이 가자.” 남자가 말했다.
“왜?”
“혼자보단… 둘.”
“치, 맨날 나 죽이려고 달려들더니 이제 와서 둘이서 살자고? 너무 낭만적인 거 아니야?” 미나가 투덜거렸지만, 건포도 봉지를 움켜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황폐해진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은 지독하게 외로운 일이었다. 비록 망치 든 스튜 강도에 복숭아 육포 스튜나 만들어 먹는 괴짜이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꽤나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내 이름은 미나야.” 미나가 건포도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미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현우.” 그가 말했다.
“현우? 흐음… 나쁘지 않네. 야, 현우야. 너 다음엔 스튜 말고 뭘 찾아줄 건데?”
“글쎄.” 현우는 짧게 대답하며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야! 벌써 가? 좀 기다려! 너 너무 빠르다고!”
미나는 투덜거리면서도 현우의 뒤를 따랐다. 잿빛으로 물든 폐허 도시의 지하 창고를 벗어나자, 이미 밤이 깊어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은 황폐하고 위험했지만, 미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현우가 찾아낼 스튜는 무슨 맛일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감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복숭아 육포 스튜만 아니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