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정말로 그랬다. 스물아홉. 사랑스러운 남자친구, 아니 이제 곧 남편이 될 현우와 알콩달콩 연애한 지 5년. 둘은 이제 막 결혼을 약속했고, 평생을 함께할 보금자리까지 마련했다. 심지어 나는 내가 어릴 때부터 꿈꾸던 패션 디자인 회사에서 실장으로 승승장구 중이었다. 모든 것이 그림 같았다. 잡지 표지에 실려도 손색없을 정도랄까.
특히 현우는 내 삶의 척도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 옆을 지켜준 첫사랑이자, 내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미소 한 번이면 세상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우와 나를 이어준 게 바로 수민이었다. 내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 수민.
“지아야, 드레스 진짜 예술이다! 너한테 찰떡이야.”
피팅룸 거울 앞에서 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옆에 선 수민은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으며 과장된 리액션을 날렸다.
“진짜? 나 너무 들뜨나?”
“들떠도 돼! 네가 드디어 가는 건데! 현우 오빠 보면 기절하겠네.”
수민은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현우는 오늘도 야근이라며 함께 오지 못했다. 내가 고른 드레스가 현우의 취향에 딱 맞을 거라며 수민과 나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수민은 내 결혼 준비에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웨딩홀 섭외부터 신혼여행지 물색까지, 그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았을 거다. 나는 수민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셋은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다.
드레스 피팅을 마치고 수민과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테이블 위에는 스테이크와 와인이 놓여 있었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혼하면 제일 먼저 뭐 할 거야?” 수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음… 현우랑 밤새도록 영화 보고, 아침에는 늦잠 실컷 자고 싶어. 회사 생각 안 하고.”
“크으, 부럽다! 빨리 아기 낳아!”
“벌써? 난 좀 더 현우랑 둘이 즐기고 싶은데.”
수민은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렇게나 예뻤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 웃음이 내 등 뒤에서 칼을 갈고 있는 소리일 줄은.
다음 날, 나는 들뜬 마음으로 현우에게 어제 찍은 드레스 사진을 보내려 갤러리를 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수민이 찍어준 사진 말고, 내가 현우에게 보내려고 했던 사진 폴더에 이상한 파일이 보였다. ‘현우♡수민 비디오’라는 이름.
내 손은 덜덜 떨렸다. 뭘까? 현우가 수민이랑 내 서프라이즈 파티라도 준비한 건가? 아니면… 설마.
나는 미친 듯이 그 파일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에 재생된 영상은 내 모든 세상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현우와 수민이 있었다. 내가 현우에게 선물했던 커플 잠옷을 입은 현우와, 내가 수민에게 직접 만들어준 헤어밴드를 한 수민. 그들은 내 신혼집 거실 소파에 뒤엉켜 있었다.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키스하고… 내가 수민에게 선물했던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고, 내가 직접 인테리어했던 그 보금자리에서, 내가 평생을 약속한 남자와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눈앞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 이런 것이구나. 비명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 했지만, 소리 한 점 내지 못했다. 그저 온몸이 마비된 듯 얼어붙어 화면만 응시했다. 영상 속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내가 바랐던 행복. 내 것이라고 믿었던 행복.
영상이 끝났다. 내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져 카펫 위로 맥없이 나뒹굴었다. 화면은 검게 변해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내 망막에 잔상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숨쉬기가 힘들었다. 마치 폐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공기가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고, 동시에 수많은 질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언제부터? 왜? 어떻게?
나는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내 집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이대로 이 공간에 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딘지도 모르게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마치 지옥에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달리다 어느새 익숙한 골목에 다다랐다. 현우와 내가 연애 초반 자주 찾던, 한적한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벤치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줄도 모르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스테리컬한 웃음이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내가 완벽하다고 믿었던 인생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나는 내가 굳건히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성이, 사실은 모래성보다 더 허약했음을 깨달았다. 현우와 수민, 그 둘이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는데. 내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 나를 가장 잔인하게 배신했다.
내게 남은 건 무엇인가. 텅 빈 가슴과 재가 되어버린 꿈들.
“젠장… 젠장…!”
나는 주먹으로 벤치를 내리쳤다. 손등이 아려왔지만,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비참하게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내 안에서 차가운 분노가 꿈틀거렸다. 복수심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빌딩 숲이 보였다. 그 빛들이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눈물을 닦아내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 완벽한 몰락을 보여줬으니… 이제 완벽한 복수를 보여줄 차례다.
현우, 수민. 너희 둘은 내가 얼마나 치밀하고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야.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너희는 배로 갚게 될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발걸음은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밤공기가 내 뺨을 스쳤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내 인생의 2막은, 지옥에서 온 복수의 여왕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은, 너희 둘이 만들어준 거야.
고마워해야 할까? 아, 아니.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내 복수극은, 그들의 완벽한 비극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