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304호의 그림자

현우는 어깨에 멘 가방을 대충 벗어던지고는 거실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고된 하루였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의 굴레 속에서 그는 자신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서른, 아직 청춘이라 불릴 나이였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한참을 닳아버린 낡은 기계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적막했다. 이 넓은 도심 속에서 그의 1304호 아파트는 마치 거대한 유리병 속의 작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였지만, 그 빛들은 그에게 어떤 온기도 전해주지 못했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부엌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머그컵에 닿았다. 분명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설거지통에 넣어뒀던 컵이었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와서 씻어놓은 기억도 없는데.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깜빡했나? 아니면 아침에 설거지통에 넣은 줄 알았는데 그냥 식탁에 뒀던 건가. 요즘 워낙 정신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물컵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식탁 위를 쳐다봤다. 아까 그 머그컵. 조금 전 분명 식탁의 오른편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왼편, 그것도 중앙으로 살짝 이동해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내가 아까 본 위치를 잘못 기억한 건가? 피곤하면 별 이상한 착각을 다 한다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이따 샤워하고 바로 자야겠다.

그때였다. 쿵, 하고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듯한 둔탁한 소리. 이어서 드르륵, 하고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현우는 귀를 기울였다. 이 시간에? 늦은 시간이라곤 해도 아래층에 사람이 사는 건 분명했다. 층간 소음인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쿵, 드르륵. 쿵, 드르륵. 마치 무거운 가구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반복되었다. 현우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보통 같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겠지만, 오늘따라 유독 신경이 날카로웠다.

“이 시간에 대체 뭘 하는 거야.”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아랫집에서 인테리어 공사 같은 걸 하는 건 아닐까? 밤에 공사를 하는 건 불법일 텐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는 대신 일단 직접 가서 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더 이상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았다.

소리는 그의 뒤, 바로 주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스르륵.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가 유리 표면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현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이 드리워진 부엌 안, 냉장고의 은빛 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소리는 분명 그 냉장고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쿵.

이번엔 둔탁한 충격음이었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분명 아까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신 뒤, 닫는 것을 깜빡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항상 모든 문을 꼼꼼히 닫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두운 부엌 안에서, 냉장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마치 낡은 경첩에서 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냉장고 안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며 어두운 부엌을 창백하게 비췄다.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 문은 닫혀 있었는데, 누가 연 것도 아닌데,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열린 냉장고 문 안쪽,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의 플라스틱 칸막이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툭툭 건드리는 것처럼. 이윽고, 칸막이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플라스틱 소리가 이 적막한 공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뭐… 뭐야.”

현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그가 아는 한, 이 아파트에는 그 혼자 살고 있었다.

그때, 냉장고 안에서 작은 얼음 조각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현우의 발치에서 멈췄다. 작은 얼음 조각이지만, 그의 눈에는 마치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이한 인상으로 박혔다.

그는 몸을 뒤로 물렸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피곤함 때문에 보는 환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냉장고 문이 다시 한번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열렸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이제 그의 얼굴을 직접 비췄다. 차갑고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 검고, 형체가 없는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냉장고 안의 어둠이 스스로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둠 그 자체였지만, 동시에 어둠이 아닌, 어떤 존재의 윤곽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현우는 얼어붙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의 공포로 마비된 것 같았다.

그 그림자는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형체가 없는 존재는 냉장고 밖으로 기어나오려는 듯, 문틈 사이로 미끄러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액체처럼 형태를 바꾸며, 주방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차갑고 끈적이는 공포가 현우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검은 그림자 덩어리 위로, 냉장고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마치 그 안에 있던 ‘무언가’를 가두려는 듯이.
혹은 그 ‘무언가’가 밖으로 나왔음을 알리는 듯이.

현우는 숨을 헐떡였다. 차갑게 땀으로 젖은 몸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 속, 냉장고 앞에 떨어진 작은 얼음 조각은 아직 녹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얼음 조각 위로,
아주 희미하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 조그만 얼음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현우는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거실에서 풍겨오는 알 수 없는 악취에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것은 썩은 물고기 냄새 같기도, 오래된 흙먼지 냄새 같기도 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1304호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