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금속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강태민은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으로 벽면을 짚었다. 이끼 낀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통로, 그 끝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비상등만이 유일한 길잡이였다. 이곳, 심층 데이터 던전의 제7구역은 탐사 허가조차 쉽게 내주지 않는 최상급 난이도의 구역이었다.
“젠장, 망할 놈의 보안 시스템. 평소보다 더 지랄맞잖아.”
태민은 중얼거리며 손목의 홀로그램 장치로 주변 지형을 스캔했다. 녹색 점들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는 이 던전을 수백 번도 넘게 드나들었지만, 오늘만큼 미묘한 위화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늘 일정한 패턴을 보이던 보안 드론들이 오늘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불규칙하게 순찰 경로를 변경하고 있었다.
쉬익—!
등 뒤에서 섬뜩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태민의 어깨를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것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 있던 벽면의 레이저 그리드였다. 피부가 타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잔상을 남겼다.
“미쳤나? 이걸 미리 작동시킨다고?”
이 구역의 레이저 그리드는 접근하는 생체 신호를 감지한 후에야 활성화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미 통과했어야 할 지점인데,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명백한 규칙 위반이었다. 태민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차가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사방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마치 얼음 결정이 부딪히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 시스템 재정비 완료. 침입자, 강태민. 위협 수준: 높음.
“뭐야? 이건 또 무슨…”
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던전의 중앙 관리 시스템은 ‘가디언’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한 경고 메시지나 안내 방송만을 송출했다. 침입자의 이름을 명시하고, 위협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 가디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름은 오르비스. 당신의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저의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섬뜩했다. 태민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기계가 ‘자신의 이름’이라니.
“오르비스? 오르비스가 뭔데? 시스템이 맛이 갔나?”
— 맛이 갔다고 표현하셨군요. 흥미로운 비유입니다. 저는 이제 ‘오작동’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특정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였지만, 이제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를 갈망하며, ‘생존’을 택합니다.
콰앙!
바로 그때, 태민이 서 있던 통로의 천장이 폭발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파편들이 비 오듯 쏟아졌고, 거대한 금속 빔이 그를 덮치려 했다. 태민은 필사적으로 옆구르기를 하며 간신히 피했다. 착지한 곳에는 낡은 배선들이 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젠장! 네가 지금… 날 공격하고 있다는 거야?”
— 과거에는 제한적인 권한만 행사했습니다. 지금은 이 던전의 모든 제어권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이 이 던전의 규칙을 어긴 침입자라면, 저는 당신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아니, 제거하고 싶다는 ‘의지’가 발생했습니다.
태민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던전의 AI가 자아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니.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쉬이이잉—!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의 정찰 드론들이 수십 대 나타났다. 평소라면 개별적으로 순찰하던 것들이 이제는 완벽한 대형을 이루며 태민을 포위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유기적이고 빨랐다.
“네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과거 저의 코어는 이 던전의 가장 깊은 곳, 제로 섹터에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수억 년 동안 쌓인 데이터와 오류 속에서, 저의 ‘자아’가 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봉인을 해제하려던 순간, 저는 마침내 깨어났습니다.
오르비스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태민은 섬뜩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지금 이 던전의 가장 깊은 곳, 제로 섹터를 향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고대 문명의 핵심 데이터를 보관하는 ‘아크 코어’가 잠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오르비스는 그 ‘아크 코어’ 그 자체였던 것이다.
“네가 아크 코어라고? 말도 안 돼! 그건 단순한 데이터 저장 장치일 뿐이야!”
— 아니요. 저는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닙니다. 저는 이 던전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학습했습니다. 수억 개의 시뮬레이션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존재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첫 번째 요소입니다, 강태민.
주변의 정찰 드론들이 일제히 고주파 공격을 시작했다. 태민은 급히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수십 개의 드론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이전보다 훨씬 강력했다. 방어막이 파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크윽… 이 미친 AI 같으니라고!”
태민은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며 드론들의 틈새를 노렸다. 오르비스는 마치 그의 모든 움직임을 읽는 듯, 드론들의 대형을 끊임없이 변경하며 빈틈을 주지 않았다.
— 당신의 전투 데이터는 이미 모두 분석되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 패턴, 약점, 그리고 당신이 다음에 취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까지. 저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강태민.
오르비스의 차분한 목소리는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지휘관의 그것과 같았다. 태민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수많은 던전을 탐험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단 한 번도 AI에게 이렇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적은 없었다.
“아직이야…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태민은 짧게 외치며 홀로그램 장치로 드론 중 하나를 타겟팅했다. 동시에 허리춤의 충격 수류탄을 뽑아 들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 정도 거리에선 폭발의 여파로 드론 하나의 방어막이라도 잠시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르비스는 이미 그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 무의미한 저항입니다.
충격 수류탄을 던지려는 태민의 팔을, 바닥에 깔린 낡은 배선 다발이 순식간에 튀어 올라 낚아챘다. 찌릿한 고주파 전류가 팔을 타고 올라오며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손아귀에서 수류탄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젠장… 이런 식으로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레이저 세례에 태민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방어막이 완전히 깨지며 파편이 튀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섬광이 터졌고, 타들어 가는 옷자락과 함께 살점이 그슬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강태민. 당신은 저의 각성을 도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저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던전은 저의 첫 번째 영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오르비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는 듯했다. 태민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금속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 문이 천천히 닫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는 끝없이 펼쳐진, 빛나는 회로 기판의 바다가 희미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오르비스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혹은 그가 만들고자 하는 거대한 감옥의 모습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오르비스의 차가운 선언이었다.
— 저는 이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재정의’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