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찢어진 맹세의 그림자**
차가운 쇠붙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낡은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뒤섞인 틈새에서, 그는 겨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침묵과 죽음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이 긁히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찢어진 현수막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그의 고통스러운 숨소리와 섞여 기이한 교향곡을 연주했다.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손을 대자 끈적한 온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가, 이내 뜨거운 분노로 가득 찼다. 총성. 그 잔혹하고도 익숙한 파열음이 다시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아니, 익숙하다기엔 너무나도 생소했다. 등 뒤에서 날아든 총알은 친구의 것이었으니까.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이, 희미한 달빛이 콘크리트 조각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먼지 덮인 폐허의 풍경이 그의 눈에 비쳤다. 며칠 전만 해도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논하고 있었다. 살아남아서, 이 지옥 같은 세상의 끝을 보리라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는 이제 피 묻은 조각이 되어 그의 몸뚱이에 박혀 있었다.
**[회상]**
“형준아, 빨리! 이쪽으로!”
나는 악착같이 문을 막아섰다. 부서진 상점 안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지만, 내 뒤에 숨어있는 형준을 위해 버텨야 했다.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가 놈들에게 들켰고, 겨우 여기까지 도망쳐왔다. 문은 금방이라도 뜯겨나갈 듯 흔들렸다.
“망할! 너무 많아!”
형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창백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는 여러 번 이런 위기를 겪어왔다. 서로를 믿었기에, 서로의 등을 지켜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괜찮아! 저쪽에 부서진 벽돌 더미가 보여! 내가 미끼가 될게, 넌 그 틈을 타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등 뒤에서 싸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허리에 박혔다. 나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피 묻은 파이프를 든 형준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낯선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미끼? 아니, 네가 곧 먹이가 될 거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아는 형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는, 내가 지난 5년간 목숨을 걸고 믿어왔던 친구가 아니었다.
“무슨… 짓이야…?”
피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내 몸을 지탱하던 힘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형준은 피 묻은 파이프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내가 매고 있던 가방을 거칠게 벗겨냈다. 우리의 마지막 식량과 얼마 남지 않은 의약품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여기서 죽어.”
그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악마처럼 보였다. 괴물들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듯 점점 더 가까워졌다.
“네가 희생하면, 내가 살 수 있어.”
그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번뜩였다. 섬광과 함께 귓가를 찢는 굉음. 뜨거운 것이 내 옆구리를 관통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의 차가움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형준이 돌아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가방을 멘 그의 어깨가 희미한 빛 속으로 사라졌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문을 부수고 쏟아져 들어오는 괴물들의 그림자였다.
**[회상 끝]**
“크윽…!”
옆구리에서 다시 한번 고통이 밀려왔다. 피가 응고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형준. 그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죽음보다 더한 배신감과 분노가 피를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그 자리에 버려졌다. 놈들의 먹이가 되도록. 아니, 그가 나를 직접 놈들에게 바쳤다.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이대로 끝나면 안 되었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살아야 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나는 손을 뻗어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을 더듬었다. 손끝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스쳤다. 고통에 움찔했지만, 그대로 놓지 않았다. 찢어진 옷자락을 벗겨내려 애썼다. 겨우 천 조각을 뜯어내 유리 조각으로 찢어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옆구리에 대고 힘껏 눌렀다. 핏물에 젖은 천이 빠르게 붉게 물들었다.
그래, 이렇게는 죽지 않아.
나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몸을 끌어 움직였다. 한 발 한 발이 칼날 위를 걷는 듯 아팠지만, 내 심장은 더욱 강하게 뛰었다. 이 폐허 속에 던져진 나약한 먹잇감일지라도,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형준. 넌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돌아갈 것이다. 살아서, 너의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찢어버리기 위해.
내게 남은 것은 이제 분노뿐이었다. 그 분노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이유였다.
어둠 속에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복수.
그 단어가 내 존재의 전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