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금기의 심연
황량한 바람이 텅 빈 창틀을 휘돌아 나가는 소리가,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심장을 울리는 듯했다. 한때 마법사들의 찬란한 지성이 모여 빛을 발하던 곳. 허나 지금은 무너진 회랑과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조각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음습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았던 중앙 탑의 첨탑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쯤 부서진 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젠장, 이 놈의 학원은 끝까지 사람을 피곤하게 하네.”
하준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대리석 기둥에 기대섰다. 등에 멘 낡은 배낭은 무거웠고, 손에 든 소총은 차가웠다. 일주일째 이 폐허를 뒤지고 있었다. 우리가 찾던 것은 단순한 식량이나 보급품이 아니었다. 종말 이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지도 모를 ‘잃어버린 지식’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소문에는, 아르카디아 학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인류가 감당하기 힘든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하준 오빠, 저쪽 감응이 좀 이상해요.”
유진이 어깨에 매단 낡은 감지기를 움켜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감지기의 렌즈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감지기는 주변의 마력 흐름을 시각화해 보여주는 유물이었다.
“이상하다고? 어떤 식으로?”
하준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눈은 이미 유진이 가리키는 방향, 즉 학원 중앙 도서관의 붕괴된 입구를 향해 있었다.
“음… 뭐랄까, 주변의 마력 흐름은 죽어있는데, 저 안쪽에서만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느낌이에요. 마치 죽은 시체에서 심장이 홀로 뛰는 것 같은.”
서연이 유진의 옆에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연은 마력 감응에 있어서는 우리 중 최고였다. 그녀의 말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죽은 시체에서 심장이 뛴다니. 비유 한번 섬뜩하네.”
하준이 혀를 찼다. 하지만 유진과 서연의 말은 그를 더 긴장시켰다. 이 폐허에서는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위험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저 안에 우리가 찾는 것이 있을지도 몰라. 조심해서 들어가자.”
하준이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찰칵, 하는 금속음이 정적을 갈랐다.
도서관 내부는 외부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거대한 책장들은 쓰러지고, 수많은 고서들이 썩어 문드러진 종이 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서연이 말한 ‘꿈틀거리는’ 마력의 감각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쪽이에요, 하준 오빠. 확실히 이 근처에서 느껴져요.”
유진이 부서진 책장 더미 사이를 헤치며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은 다른 곳과 달리 꽤 온전해 보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문이나 통로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벽돌 사이로 검은 얼룩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피를 뿌린 후 닦아낸 것처럼.
“환영 마법인가?”
하준이 벽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하지만 마력 감지기가 그 위에서 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서연아.”
“네.”
서연이 다가가 벽에 손을 댔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마력이 스며 나오자, 벽의 검은 얼룩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그리고 이내, 벽돌 사이의 이음매가 희미하게 빛나더니,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처럼 벽의 한 부분이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안에서부터 불어 나왔다. 바람 속에는 묘한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듯한 어둡고 가파른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삼켜져 있었다.
“이런 곳에 통로가 있을 줄이야. 학원 설계도에는 없던 곳인데…”
유진이 중얼거렸다. 학원 설계도는 종말 직전, 정보 수집가들이 간신히 빼돌린 자료 중 하나였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곳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금기라는 건 원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법이지.”
하준이 손전등을 켜 어둠 속으로 비췄다. 빛은 겨우 몇 미터 앞을 밝힐 뿐, 곧 어둠에 흡수되었다.
“오빠, 저… 저거 봐요!”
서연이 손전등이 비춘 곳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부분을 가리키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하준이 다시 빛을 그곳으로 향했다. 빛이 닿자, 낡은 벽돌 계단 한구석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 드러났다. 육각형 안에 얽히고설킨 뱀의 형상, 그리고 그 중앙에는 마치 눈알처럼 보이는 핏빛 수정이 박혀 있었다. 문양 주변으로는 검붉은 얼룩이 넓게 퍼져 있었는데, 피가 말라붙은 흔적처럼 보였다.
“이건…”
하준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문양은 오래된 마법 서적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금지된 마법, 금지된 의식에 등장하는 상징이었다. 고대의 존재들을 불러내거나, 생명을 강탈하여 불사의 존재를 만드는 주술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마력이… 엄청 강해요. 그리고, 아주 오래된, 끔찍한 기운이 느껴져요. 마치… 죽음과 생명이 뒤섞인 혼돈 같은.”
서연이 얼굴을 창백하게 굳힌 채 몸을 떨었다. 그녀의 섬세한 감각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조심해서 내려가자.”
하준이 소총을 고쳐 잡았다. 유진이 뒤를 따랐고, 서연은 하준의 바로 뒤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문양을 응시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오직 우리 발소리만이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비린내는 점점 더 강해져서,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되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은 마침내 평평한 복도로 이어졌다. 복도는 굳건한 돌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 기이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까 계단에서 본 문양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크고 복잡했다. 복도 천장에는 간헐적으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거리는 마법 등이 달려 있었는데, 그 불빛 아래에서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듯했다.
“여기… 살아있는 것 같아요.”
유진이 속삭였다. 그녀의 감지기는 이제 미친 듯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저 문양들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와요. 제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요.”
서연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불안정한 마력이 그녀의 감각을 뒤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복도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철문은 검고 육중했으며, 표면에는 아까 본 뱀 문양이 수없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문틈 사이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그 안에서 거대한 화로가 타오르는 것처럼. 하지만 그 붉은빛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피처럼 차갑고 끈적한 느낌을 주었다.
“이 안이야.” 하준이 낮게 읊조렸다. “모든 것이.”
하준이 조심스럽게 철문에 다가갔다. 문의 손잡이는 따로 없었고, 그저 육중한 철덩어리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득, 하준의 손이 문에 닿으려던 순간, 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오빠, 안 돼요! 만지지 마요!”
서연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철문을 노려봤다.
“저 안에서… 수많은 생명의 비명이 들려와요.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철문에서 붉은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쩍이더니, 마치 문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문에 새겨진 수많은 뱀 문양들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복도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고, 알 수 없는 낮은 울림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쿵! 쿵! 쿵!**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철문 안에서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크고 선명해서, 벽을 타고 우리들의 심장까지 직접 때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갇혀서 발버둥 치는 듯했다.
“이… 이게 뭐야?!”
유진이 뒷걸음질 쳤다. 감지기는 이미 완전히 고장 나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준은 얼어붙은 듯 철문을 응시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빛 사이로, 무언가 끈적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빛의 왜곡이 아니었다.
**철컥! 크르르릉─!**
문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빗장이 풀리는 듯한 끔찍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이어, 철문이 서서히,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이 벌어질 때마다, 끈적하고 비릿한 공기가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하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착각이었다.
그 안은 붉은 안개로 가득했다. 안개 속에서 수많은 어둡고 끔찍한 형체들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그것들은 마치 뼈와 살이 뒤섞인 채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형체들의 중심에, 복도의 문양과 똑같은, 육각형 안의 뱀 문양이 거대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양의 중앙에는 검고 붉은 피로 얼룩진 거대한 수정이 박혀 있었고, 그 수정으로부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종류의 압도적인 공포와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살아있다고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쉬이이이이…**
안개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낮은 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언어였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소리 하나하나에 수천 년의 고통과 갈망, 그리고 지옥 같은 절망이 응축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틈이 더 벌어지자, 붉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뼈와 살, 그리고 검붉은 끈적한 물질로 이루어진,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였다. 그 덩어리의 표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불규칙하게 돋아난 촉수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움직이자, 복도 전체가 진동했다.
“도망쳐!”
하준의 비명과 동시에, 철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침내, 끔찍한 금기의 존재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