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빛 한 점 허락되지 않았을 지하 유적의 깊은 곳. 횃불의 희미한 불꽃만이 거대한 석주 그림자를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리라는 굳게 다문 입술 새로 한숨을 뱉었다. 이곳은 익숙한 고대 유적과는 달랐다. 건축물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비틀려 있었고, 벽면을 메운 문양들은 고통받는 존재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불길한 예감을 속삭였다.
“리라, 이 문양들을 보세요. 일반적인 상징이 아닙니다. 이들의 고통은… 단순히 장식이 아니에요. 살아있는 존재의 절규를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카엘이 횃불을 벽에 바싹 들이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학자 특유의 호기심과 함께 미약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리라는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춤의 단검을 쓸어 올렸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수수께끼일 뿐이야. 중요한 건 저 문양이 우리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지만 시선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유적이 품고 있는 침묵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중앙에는 불경스러운 제단이 솟아 있었다. 흑요석으로 깎아낸 듯 매끄럽지만, 그 표면에는 무수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균열 사이로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카엘이 숨을 들이켰다. “저건… 잊힌 시대의 동력원인가? 아니면… 영혼을 묶어두는 장치?”
리라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열기가 차가운 공기를 데웠다. 그 열기 속에는 희미한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치 녹슨 피 냄새 같기도 했다.
그녀가 제단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던 찰나, 발아래의 석판이 낮게 울렸다. 쿵- 하는 진동이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퍼졌다.
“리라!” 카엘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원형 공간의 벽면을 이루던 거대한 석판들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열렸다. 그 안에서 어둠보다 깊은 그림자가 기어나왔다.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피부는 잿빛으로 굳어 있었고, 눈구멍은 텅 비어 있었다. 뼈와 근육이 뒤틀린 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손으로 땅을 짚으며 기어 나왔다. 고통에 일그러진 듯한 표정은 석벽의 문양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젠장, 예상보다 빠르게 반응했군.” 리라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칼집 없는 단검 두 자루를 뽑아들었다. 은은한 마력이 깃든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카엘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마력 구슬이 뭉쳐졌다. “부패한 수호병인가! 조심해요, 리라! 저들의 공격은 맹독을 품고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수호병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리라에게 달려들었다. 동작은 느릿했지만, 맹목적인 공격성은 흉포했다. 리라는 날렵하게 몸을 숙여 발톱을 피하고, 그대로 수호병의 옆구리를 단검으로 꿰뚫었다. 푸석한 살덩어리가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역겨운 흙먼지 냄새가 터져 나왔다. 수호병은 맹목적으로 손을 휘둘렀지만, 리라는 이미 그 뒤편에 서 있었다.
그때, 카엘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화염구!”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가 수호병 무리 중 두 개체를 덮쳤다. 잿빛 몸뚱이가 타들어가며 섬뜩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채 더욱 거칠게 리라에게 돌진했다.
“피가 없으니 타격에 둔감해!” 리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수호병의 발목을 쳐 균형을 잃게 한 뒤, 몸을 날려 등 뒤에 달라붙어 목덜미를 깊숙이 찔렀다. 핏줄 대신 검은 흙과 썩어가는 고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수호병은 잠시 경련하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완전히 멈춰버린 눈구멍이 천장을 응시했다.
남은 두 개의 수호병마저 카엘의 마법과 리라의 단검 아래 쓰러졌다. 바닥에는 잿빛 먼지와 함께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이런 종류의 수호병은 처음 봅니다. 일반적인 골렘과는 달라요. 마치… 저주받은 영혼을 억지로 육체에 가둔 것 같습니다.” 카엘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리라는 떨쳐낸 수호병의 잔해를 발로 툭 차며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단은 여전히 희미한 붉은빛을 깜빡거렸다. 마치 모든 소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걸 만들어낸 자들이 평범한 목적을 가졌을 리는 없겠지. 더 깊이 들어가야겠어. 이 제단의 뒤편에 뭔가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제단 뒤편에는 예상대로 좁은 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통로는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횃불의 빛마저 집어삼킬 듯한 어둠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긁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형 홀이었다. 홀의 벽면은 검은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수정 안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들이 박혀 있었다. 그 눈동자들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을 응축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모든 눈동자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알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알의 표면에는 복잡하고 섬뜩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을 따라 미세한 맥박처럼 희미한 보랏빛이 흘렀다. 그 빛은 제단에서 보았던 붉은빛과는 다른, 훨씬 더 깊고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카엘이 지팡이를 든 채 몸을 떨었다. “이건… 이건 생명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잊힌 시대의 저주, 혹은… 봉인된 재앙 그 자체일지도 몰라요.”
리라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저 알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순히 강력한 마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 절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증오가 응축된 덩어리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알에 더 다가가려던 순간, 알의 표면을 감싸던 보랏빛이 순간 강렬하게 폭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천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쩍이며 리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신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에 직접 울려 퍼지는,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비명이었다.
리라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환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영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불길, 찢겨나가는 그림자들, 그리고 셀 수 없는 고통받는 얼굴들…
“크아악!”
그녀의 시야가 뒤틀리고,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이 비명은 알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저 안에 봉인된, 혹은 저 안에 갇힌 존재들이 내는 무수한 절규였다.
카엘마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마법 보호막이 요동쳤다.
‘젠장, 이게 대체… 뭐야!’
리라는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알을 노려보았다. 수천 개의 눈동자는 이제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섬뜩한 갈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봉인된 재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리라는 그 재앙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