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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7화: 지하심층의 설계자

먹먹한 정적이 탐사복 헬멧 안을 짓눌렀다. 수백만 년의 세월이 응고된 듯한 침묵이었다. 낡은 금속과 축축한 흙먼지 냄새가 필터를 통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우리가 방금 통과한 좁디좁은 틈새 너머,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런… 제기랄.”

케이엘의 목소리가 헬멧 통신망을 통해 낮게 울렸다.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의 눈빛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나 역시 숨을 헙 들이켰다. 우리의 탐조등 불빛이 닿는 곳마다, 거대한 구조물이 끝없이 이어졌다. 거친 암반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통로, 육중한 아치형 문, 그리고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겨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건축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행성 ‘제니스’의 지표면에서 3000킬로미터 아래, 고대 유적의 중심부였다. 수십 년간 수많은 탐사선이 시도했지만 뚫지 못했던 미지의 심연. 오로지 ‘성간 기원’의 데이터베이스에만 기록되어 있던, 전설 속 ‘제1문명’의 흔적이었다.

“대체… 얼마나 깊이 들어온 거지, 리나?” 케이엘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탐조등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존 탐사 기록을 모두 뛰어넘었습니다, 선장님. 외부와 통신은… 다시 실패. 완전히 차단된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 대기 구성은 안정적이에요. 생체 반응은 아직 없습니다.”

나는 내 탐사복 팔목에 장착된 센서 판독기를 응시했다. 무의미한 숫자들이 깜빡일 뿐이었다. 외부와의 연결은 완전히 끊겼다. 망망대해의 외딴 섬이 아니라, 우주 한가운데의 고립된 소행성 같았다.

“생체 반응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해.” 케이엘이 중얼거렸다. “이런 규모의 건축물을 만든 종족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말이 안 돼.”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바닥은 매끄러웠지만, 먼지가 수만 겹 쌓여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공간 속에서 메아리쳤다.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불빛에 드러났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복잡한 선과 곡선이 얽히고설켜 있었고, 마치 은하계의 별자리를 형상화한 듯한 그림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이것 봐요, 선장님.” 내가 손전등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다른 문양들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미세한 빛을 내뿜는 듯한 조각이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구(球)가 있고, 그 주위를 여러 개의 작은 구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태양계 모형 같은데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어떤 태양계와도 달라요.”

케이엘이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벽면을 훑었다. “이 재질… 도대체 뭐지? 금속도, 암석도 아니야. 살아있는 것처럼 차가워.”

그때였다.
갑자기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 중 일부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붉은색, 보라색의 섬광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우리의 탐조등 불빛은 무색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케이엘이 소리쳤다. 그는 즉시 플라즈마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에너지 반응! 급격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선장님, 이 벽에서…!”

내 센서 판독기는 경고음을 미친 듯이 울렸다. 헬멧 안의 디스플레이 창에는 위험 수치를 알리는 붉은색 경고가 가득했다. 벽면을 따라 흐르던 빛의 파동이 거대한 아치형 문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거인이 기지개를 켜듯, 육중한 문이 굉음을 내며 안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바닥에 쌓였던 먼지가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며 시야를 가렸다. 기계적인 소음과 함께 고대의 공기가 섞인 먼지가 우리의 코를 찔렀다.

“리나, 경계를 늦추지 마!” 케이엘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의 리볼버 총구가 먼지 구름 너머의 미지 속으로 향했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자, 문 안쪽의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단순한 방이 아니었다. 거대한 돔형 공간의 중앙에는 투명한 물질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오브젝트가 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수정 구슬 같기도 했고,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품 같기도 했다. 그 안에서는 섬광처럼 반짝이는 빛이 끊임없이 일렁였다.

“선장님… 저건 대체…”

나는 오브젝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강력한 이끌림이었다. 투명한 구 안에서 반짝이던 빛들이 갑자기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들이 모여들더니, 돔형 공간의 벽면에 홀로그램 영상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들이었다. 하지만 곧 선명해지면서, 경악스러운 영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별들이 부서지고, 행성들이 불타는 영상이었다. 굉음 없는 우주의 파괴가 홀로그램으로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거대한 함대들이 서로를 향해 광선을 쏘아대고, 행성 표면은 끝없는 폭발로 뒤덮였다. 그 혼란 속에서, 거대한 구조물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우주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들은 우리가 있는 이 유적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이건… 전쟁 기록이야? 대체 어떤 종족의…?” 케이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파괴가 아니라, 건설의 시대였다. 방금 전의 파괴를 겪은 듯한 행성들 위에, 이 유적과 같은 형태의 거대한 지하 구조물들이 건설되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존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지하 도시들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투명한 오브젝트와 흡사한 더 작은 구체들이 빛을 내며 떠 있었다.

그 순간, 홀로그램 영상 속의 한 존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길고 유연한 몸을 가진 생명체였다. 곤충을 닮은 듯한 다관절 팔과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무수히 많은 눈이 빛나는 얼굴. 그 존재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시선은 홀로그램 너머, 바로 우리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손짓 하나에, 화면 속의 모든 지하 구조물들이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빛의 흐름은 행성 전체를 감쌌고, 이윽고 그 빛은 별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갑자기, 오브젝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돔형 공간 전체가 섬광으로 가득 찼다. 헬멧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강해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리나! 뭔가 잘못됐어! 물러서!” 케이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빛이 사라진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 앞의 거대한 오브젝트는 여전히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안에는 단순히 빛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투명한 구체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방금 보았던, 길고 유연한 몸을 가진 고대 종족의 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 수많은 눈들이 우리를 향해 열리는 것을.

나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헬멧 안의 산소가 턱 막혔다.
저것은… 저것은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이 지하 심연은 무덤이 아니었다.

이곳은… 부화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부화가 시작되는 순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