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낡은 창틈으로 스며들어 민준의 콧등을 간질였다. 덜컹거리는 냉장고 소리만이 유일한 동반자처럼 그의 작은 자취방을 채우고 있었다. 닳아빠진 키보드 위로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화면에는 ‘미완성’이라는 꼬리표를 단 소설 파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웹소설 작가를 꿈꾸는 스물여섯 살 청년이었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뭔가 결정적인 한 조각이 늘 빠져있는 느낌. 현실은 한숨만 나오는 아르바이트와 고시원 같은 자취방이었다.
그날도 영감이 바닥난 채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쓰러졌다. 이대로 잠들기엔 답답했다. 불현듯 며칠 전, 낡은 골목길 안쪽에 숨어있는 헌책방 ‘시간의 서재’에서 본 기묘한 책 한 권이 떠올랐다. 표지는 물론 제목조차 없는, 먼지 쌓인 검은색 가죽 표지의 책.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다음 날, 민준은 홀린 듯 그 헌책방으로 향했다. 책장 구석, 등허리가 굽은 노인이 앉아 졸고 있는 카운터 맞은편에 그 책이 있었다. 여전히 제목은 없었고, 표면은 거친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낡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정교하게 마감된 가죽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이 책… 얼마예요?” 민준이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눈을 비비며 흘긋 책을 보더니, 돋보기 너머로 민준을 쳐다봤다.
“그건…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었는데.” 노인의 목소리는 삐걱거리는 문 같았다. “어디서 찾았나?”
“저기… 저쪽 구석에요.”
노인은 혀를 쯧쯧 차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가져가게. 대신 절대 버리지 말고, 조심해서 다뤄야 하네.”
민준은 얼떨떨했지만, 공짜로 얻게 된 책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책방을 나섰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민준은 책상에 책을 올려놓았다. 겉면의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자, 빛바랜 검은 가죽 아래로 희미한 문양들이 드러났다.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쓸어보니,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안쪽 페이지는 모두 비어 있었다. 종이가 삭아 누렇게 변색된 채, 아무런 글자도 그림도 없었다. 그는 실망했지만, 노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절대 버리지 말고, 조심해서 다뤄야 하네.’
민준은 무심코 손가락으로 첫 페이지를 톡톡 두드렸다. 순간, 손가락 끝에서부터 미미한 전류가 흘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방안의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뭐지? 전압이 불안정한가?”
그는 다시 페이지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텅 비었던 첫 페이지 중앙에 잉크 없이도 선명하게 고대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듯한 푸른색 문양이었다.
민준은 숨을 들이켰다. 착각일 리 없었다. 손으로 눈을 비벼 다시 보았다. 문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문양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순간, 푸른빛이 민준의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눈앞이 번쩍하고 하얀 섬광으로 가득 찼다가 사라졌다.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 놓여있던 낡은 머그컵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 이게 뭐야?!”
민준은 경악하며 손을 흔들었다. 머그컵은 이리저리 흔들리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서 푸른 기운도 사라졌다.
민준은 한동안 얼어붙은 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환상?
그는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첫 페이지의 푸른 문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문양을 짚었다. 푸른빛이 다시 몸을 감쌌고, 손에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머그컵 대신 책상 위 먼지 쌓인 펜을 바라보았다. ‘움직여라… 움직여.’ 그의 의지가 푸른 기운과 함께 펜으로 향했다. 순간, 펜이 스르륵 떠오르더니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맙소사… 진짜야…”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이 알 수 없는 힘. 머릿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상징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책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고대에 잊힌, 어쩌면 봉인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힘을 해방하는 열쇠였던 것이다.
밤새 민준은 책과 씨름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문양이 하나씩 떠올랐고, 그 문양들을 만질 때마다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나는 듯했다. 처음엔 물건을 움직이는 미약한 염동력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의지는 더욱 선명해졌고, 힘도 강해졌다. 그는 방 안의 작은 물건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거나, 아주 작은 불꽃을 피워볼 수도 있었다. 힘을 사용할 때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에너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야.”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은 여전히 평화로웠지만, 민준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고작 하루아침에, 그는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에서 고대의 신비한 힘을 다루는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이 힘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이 힘이 생긴 이유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다른 페이지들과는 달리 그곳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먹먹한 공백이 느껴졌다. 민준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손바닥에서 피어나는 푸른빛이 방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부름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