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검은 파도, 천하의 부름
천하의 운명은 언제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 아래, 언제든 격랑이 휘몰아칠 수 있는 균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마침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중원 북부, 설백의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백련산맥. 그중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한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월은 암자 앞, 조약돌이 깔린 마당에서 조용히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검 끝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을 갈랐으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지를 품는 듯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수련복 소매가 바람 한 점 없이 휘날리는 모습은, 흡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벌써 백 년이 흐른 것인가.”
나직이 읊조린 목소리에는 스산한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 비월은 검을 거두고 멀리 펼쳐진 산맥의 끝자락을 응시했다. 해 질 녘 노을이 봉우리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였다. 맑고 깨끗했던 강물이 탁해지고, 생명으로 가득했던 숲에 알 수 없는 병이 들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과 탐욕이 뿌리내렸다. 마도(魔道)의 세력이 고개를 들고, 강호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월은 그 모든 변화의 근원이 저 멀리, 세상의 심장부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어둠의 봉인이 약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직감은 싸늘한 현실로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에서 거대한 검은 파도가 밀려들었다. 파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검은 안개에 가까운 그것은, 온 천하를 뒤덮을 듯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마기를 머금은 기운은 백련산맥의 차가운 공기마저 뒤틀리게 했다. 비월의 암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청량한 기운이 잠식당하며, 나뭇잎들이 시들고 바위에는 검은 이끼가 피어났다.
비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이 마기를 막아내려 했지만, 이 거대한 파도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봉인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천지가 울리는 거대한 북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 리 밖에서도 들릴 듯한 압도적인 음파이자, 동시에 모든 강호인들의 심장을 꿰뚫는 강력한 정신의 외침이었다.
**”천하의 모든 강호인들이여! 귀 기울이라!”**
맑고도 웅장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마기의 장막을 뚫었다. 듣는 이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이 목소리는, 중원 오대세가 중 으뜸이자 무림의 가장 오래된 뿌리라 불리는 ‘천무문(天武門)’의 문주, 현천도인(玄天道人)의 목소리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어둠의 마기(魔氣)가 마침내 천하를 위협하고 있다! 봉인이 약해져 그 기운이 곳곳을 좀먹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수백 년 전의 대혼란이 재림할 것이다!”**
비월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수백 년 전의 대혼란. 그것은 무림 전체가 마도에 휩쓸려 피와 절규로 물들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이에 천무문은 중원 오대세가, 사대문파, 그리고 모든 정의로운 강호인들의 뜻을 모아 ‘천무대전(天武大戰)’을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천무대전! 듣는 순간, 강호의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천하제일인을 가리는 무술대회가 열리는 것은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강자를 가리는 대회가 아닐 터였다.
**”천무대전은 삼 년 후, 천무산 정상에서 열릴 것이다! 천하의 모든 젊은 영웅들은 물론, 은둔한 고수들까지! 무림의 기둥이 될 재목들을 가려낼 것이다!”**
현천도인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었다.
**”이 대전의 승자는 단 한 명! 그는 천하의 운명을 짊어질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봉인을 강화하고 마기를 정화할 ‘천무신검(天武神劍)’을 다스릴 유일한 자가 될 것이다!”**
천무신검! 그 이름이 언급되자 강호는 발칵 뒤집혔다. 천무신검은 수백 년 전, 마기의 침략을 막아냈던 신비로운 검으로,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그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전설의 무기였다. 그 검을 다룰 자를 뽑기 위한 대전이라니. 이번 대회는 그야말로 천하의 존망이 걸린 것이었다.
**”오직 순수한 무력과 깨끗한 정신으로 무장한 자만이 신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도전할 수 있으나, 탐욕과 사심에 물든 자는 봉인의 힘 앞에 스러질지니라!”**
경고와 함께 현천도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거대한 북소리는 천천히 멈췄지만, 그 여파는 온 천하에 깊고 거대한 파동을 남겼다. 잠들어 있던 강호는 순식간에 들끓어 올랐다.
비월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스승의 마지막 유언이 스쳐 지나갔다.
*‘네 검은 세상을 구원할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다. 허나 명심하라. 진정한 힘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넘어, 모두를 지킬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백 년간 세속을 등지고 홀로 무도에 정진해왔던 삶이었다. 강호의 명예나 권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의 운명이 자신의 눈앞에 던져졌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은 비월의 검이자, 그가 지켜야 할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천무대전이라….”
비월은 검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산맥 너머의 세상은 이미 희망과 절망,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거대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혼돈의 한가운데로, 그는 자신의 검을 들고 나아가야만 했다.
고요했던 백련산맥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마기는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지만, 비월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깨고, 이제 한 검객의 발걸음이 천하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