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고, 대지는 갈라져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혁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린내와 먼지 섞인 흙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다음으로 그의 시야를 채운 것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골들이었다. 한때 높은 빌딩이었을 것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검붉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젠장… 여기가 어디야?”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입 안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어제의 기억이 희미했다. 분명 퇴근길이었을 텐데. 횡단보도를 건너다 트럭 경적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다음은 암전. 그리고 이 지옥 같은 풍경.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셨지만, 심각한 외상은 없는 듯했다. 등 뒤에는 낡은 배낭 하나가 덜렁거렸다. 열어보니 너저분한 책 몇 권, 펜, 낡은 지갑, 그리고 다 식은 커피캔 하나가 전부였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 대체 뭐가 필요하다는 건지.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땅바닥에 듬성듬성 자란 식물들이 들어왔다. 회색빛 흙을 뚫고 솟아난 풀들은 마치 강철선을 엮어놓은 듯 딱딱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는 평범한 풀 같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잎맥마다 검붉은 액체가 흐르는 것이 기이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목을 조여왔다. 그러나 지혁은 이상하게도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는 곤경에 처할수록 더 냉정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물이었다. 극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그는 무너진 건물 틈새를 뒤지며 물을 찾았다. 하지만 수많은 잔해들 속에서 물 한 방울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햇빛은 없었지만, 주변의 열기는 숨 막힐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저 멀리 폐허 더미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이 들어왔다. 마치 작은 별이 떨어진 것처럼, 약하지만 분명한 빛이었다.

“…뭐지?”

지혁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낡은 철근 조각을 주워들었다. 빛을 따라 걷다 보니, 무너진 건물의 지하로 통하는 듯한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는 돌과 흙으로 막혀 있었지만, 그 틈새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버섯이었다. 지름이 족히 1미터는 될 법한 그 버섯은 푸른 형광을 내뿜고 있었다. 버섯의 표면에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렸고, 그 액체는 주변의 흙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물…인가?”

지혁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액체를 찍어 맛보았다. 흙맛이 섞인 밍밍한 물맛. 역했지만, 마실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다 식은 커피캔에 물을 받아 마셨다. 목구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에 온몸의 세포가 환호했다.

그때였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치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쇠붙이 같은 갈퀴를 가진 쥐였다. 보통 쥐보다는 훨씬 크고 사나워 보였다.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며 지혁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젠장!”

지혁은 반사적으로 철근을 휘둘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쥐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녀석의 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위험했다. 하다못해 쥐새끼조차도.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그는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푸른 버섯 근처에, 이 세계의 식물과는 다른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작고 붉은 열매였다. 그의 눈은 빠르게 열매의 형태, 색깔, 주변 식물과의 관계를 분석했다. 지구에 있을 때 등산 중 우연히 배운 독초 식별법이 떠올랐다. 이 열매는 독이 있는 종류의 식물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죽을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젠장,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엔.”

지혁은 열매 하나를 따서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쌉쌀하면서도 약간의 단맛이 느껴졌다. 독은 없었다. 그는 배가 찢어질 듯이 열매를 먹어치웠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가 겨우 허기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구…세요?”

작고 앳된 목소리였다. 지혁은 화들짝 놀라 철근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빛 속으로 걸어 나오자,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아이의 손에는 어른의 키만 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몽둥이 끝은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너는… 누구니?” 지혁이 물었다.

아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철근을, 그리고 주변의 쇠갈퀴 쥐 시체를 번갈아 보았다.

“여긴 제 구역이에요. 당신은 침입자예요.”

“침입자라니. 난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야.”

“다들 그렇게 말하죠.” 아이는 몽둥이를 바닥에 툭, 하고 내려찍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사라지세요. 아니면….”

아이의 목소리에는 어둠과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지혁은 잠시 당황했다. 이 어린 아이가 이런 곳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말인가?

“난 아린이에요. 당신은요?” 아이가 불쑥 물었다.

“지혁이야.”

“지혁 씨는… 어디서 왔어요? 이렇게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 오랜만인데.” 아린은 그의 낡은 배낭과 헤진 운동화를 보며 말했다.

“그건… 설명하기 복잡해.”

아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푸른 버섯을 힐끗 보더니, 지혁이 먹다 남은 열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열매… 먹을 만해요?”

“응. 독은 없어.” 지혁은 남은 열매 몇 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먹어봐.”

아린은 잠시 망설이더니 열매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열매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네요! 아빠가 그랬어요, 이 열매는 색깔만 예쁘지 먹으면 배탈 난다고….”

“네 아빠는 어디 계시니?”

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래 전에… 회색 산맥 너머로 가셨어요. 다시는 못 올 거라고 하셨지만… 언젠가 다시 오실 거예요. 제가 여기서 기다리면.”

지혁의 가슴이 찡했다. 이 아이는 이 척박한 곳에서 혼자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끼에에엑-!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지하 입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날개, 뾰족한 부리, 그리고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거대한 맹금류였다. 등껍질 수리.

“숨어!” 아린이 비명을 지르며 지혁을 끌고 폐허의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저건… 등껍질 수리예요! 밤에는 더 사나워져요!”

등껍질 수리는 폐허 위를 맴돌았다. 날카로운 시선은 먹잇감을 찾듯 주변을 훑었다. 지혁은 아린과 함께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녀석이 지하 입구 쪽으로 내려오려 하는 것이 보였다. 푸른 버섯의 빛에 이끌린 것 같았다.

아린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혁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등껍질 수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린아, 저 녀석이 푸른 버섯 빛에 이끌린 것 같지?”

“네… 빛에 약한데, 밤에는 눈이 밝아져서 더 잘 봐요.”

“그럼 저 빛을 가리면 어떨까?”

지혁은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천장에서 떨어진 낡은 천막 조각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천막을 잡았다. 아린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 하게요?”

“버섯을 가릴 거야. 네가 날 도와줘야 해.”

등껍질 수리는 지하 입구 가장자리에 내려앉아 푸른 버섯을 탐색하고 있었다. 지혁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천막을 들고 버섯 쪽으로 기어갔다. 아린은 그의 뒤를 따랐다.

가까스로 버섯 근처에 다다른 지혁은 아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은 몽둥이를 휘둘러 주변의 잔해들을 떨어뜨렸다. 쿵! 쿵! 소리가 등껍질 수리의 주의를 끌었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는 순간, 지혁은 재빨리 천막을 버섯 위로 덮었다.

순식간에 푸른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등껍질 수리는 혼란스러운 듯 울부짖었다. 녀석은 잠시 주춤하더니, 방향을 잃은 듯 허둥지둥 날갯짓을 하며 멀리 사라져갔다.

지혁은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아린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경외감, 그리고 아주 작은 믿음이 엿보였다.

“지혁 씨… 대단하다.”

“겨우… 숨통만 트인 거지.” 지혁은 힘없이 웃었다. “밤은 이제 시작이야.”

밤은 예상보다 길고 혹독했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울음소리,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리. 등껍질 수리가 돌아올까 봐, 혹은 더 무서운 무언가가 찾아올까 봐, 지혁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린은 그의 옆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지혁은 고개를 들어 폐허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멸망시킬 듯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살아남아야 해.’

그는 아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폐허 속에서, 작은 체온이 희미한 위로가 되었다.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였다. 지혁은 알고 있었다. 이 밤을 버티고,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는 것. 그것만이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목표였다. 비록 잿빛 여명이 다시 찾아올지라도, 그들은 살아남을 것이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아린의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를 그 희망의 날을 위해서.

아침이 오자, 붉은 달은 사라지고 희미한 잿빛 여명이 하늘을 채웠다. 밤새 덮어두었던 천막을 걷어내자 푸른 버섯이 다시 빛을 뿜어냈다. 지혁은 물을 마시고 남은 열매를 아린과 나누어 먹었다.

“아린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밤에는 너무 무서워요. 낮에 먹을 걸 좀 더 찾아야 해요. 그리고… 더 이상 등껍질 수리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해요.”

“어디로 갈 건데?”

아린은 저 멀리, 검붉은 구름이 낮게 깔린 지평선을 가리켰다. “저 너머에요. 아빠가 그랬어요. ‘회색 산맥’ 너머에… 작은 ‘안식처’가 있다고. 거기엔 푸른 하늘이 있대요.”

회색 산맥. 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끝없이 펼쳐진 폐허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그것은 산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죽음의 장벽 같았다.

“그래, 그럼 그 ‘안식처’까지 가보자.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아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폐허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빛 같은 미소였다. 지혁은 다시 배낭을 고쳐 메고, 아린은 몽둥이를 굳게 움켜쥐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부서진 도시의 잔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잿빛 여명 아래,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희망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