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석벽을 타고 흐르는 눅진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청운은 무감한 표정으로 한 줄기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서는 축축한 흙과 알 수 없는 돌 조각들이 밟혔고, 오래된 먼지 냄새와 함께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소연의 손에 들린 화접등(火蝶燈)을 잠시 응시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꽃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기괴한 문양으로 가득 찬 벽을 어지럽게 비췄다.
“대사형… 여기 정말… 뭔가 있어요.”
소연의 목소리는 희미한 빛마저 집어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옷깃을 바싹 여몄다. 불안정한 숨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렸다.
청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둠에 익숙해진 터였다.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석벽을 쓸어보았다. 매끄러우면서도 어딘가 거친 감촉.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거대한 한 덩어리의 암석을 깎아 만든 통로였다. 인위적인 흔적과 함께, 오랜 세월 자연이 빚어낸 듯한 기괴한 균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기운은… 처음 느껴봐요.”
소연은 화접등을 벽에 더 가까이 비췄다. 조잡한 형태로 깎인 듯한 벽화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인간형의 형상과 뒤섞여 기묘한 의식을 치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림 속 짐승들의 눈이 이글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잊혀진 왕’의 마지막 안식처라고 했어요. 하지만 왕실 도서관의 어떤 기록에도 그 왕의 이름이나 업적은 남아있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 고의로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것처럼…”
소연은 학자로서의 지적 호기심과 타고난 소심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동시에 진실을 파헤치고 싶다는 열망으로 번뜩였다.
“지워진 기록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지.”
청운의 낮은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묵직하게 울렸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로의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점차 복잡해지고 있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닌 부호처럼 보였다. 그의 예리한 감각이 미세한 변화를 포착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살아있는 듯한 기운.
그때였다. 좁은 통로의 끝, 거대한 암석이 거칠게 깎인 듯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짐승의 입처럼 벌어진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 나왔다. 한없이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 나쁜 침묵이 그들을 덮쳤다.
“이곳이에요, 대사형. 기록에 있던 ‘침묵의 심장부’가….”
소연이 숨을 죽이며 속삭였다. 그녀는 감히 그 입구 안으로 시선을 던지지 못하고, 청운의 넓은 등을 응시했다.
청운은 말없이 그 입구로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화접등 빛에 길게 늘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은 예상과 달리 확 트여 있었다. 거대한 돔형 천장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묻혀 있었고, 중앙에는 정체불명의 제단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제단을 감싸는 듯한 거대한 석주들이 사방에 박혀 있었으나, 그중 절반 이상은 이미 부서져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석재들 사이로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이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제단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표면에는 섬세하고도 음산한 문양들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언어로 보이는 각인이 제단의 둘레를 감싸고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하게 붉은색이 감돌았다. 마치 마르지 않는 피를 흡수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어요?”
소연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단 앞으로 다가가 화접등을 높이 들었다. “기록에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 잠들어 있다’고… 왕의 모든 지식과 힘이 응축된 유물이 여기에 있다고 했는데… 텅 비어 있어요.”
청운은 제단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그의 눈이 제단의 옆면에 멈췄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양들 사이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움푹 파인 자국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끼워 넣었던 자리처럼. 자국은 완벽한 원형도, 사각형도 아닌, 불규칙하면서도 정교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 자국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 그리고 미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무언가 강력한 것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었다는 증거였다. 잔류한 기운은 너무나 희미해서 일반인이라면 감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운은 달랐다. 그의 심장 속 ‘푸른 심맥(青心脈)’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그 기운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려주는 듯했다. ─ 생명력과는 거리가 먼, 차갑고 견고한, 그러나 파괴적인 힘.
그 순간이었다.
제단 주변의 바닥에서 옅은 진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미했던 진동이 점차 강해지더니, 주변의 석벽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돔형 천장에서 미세한 흙먼지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대사형! 지진인가요?”
소연이 겁에 질려 청운의 팔을 잡았다. 화접등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주변을 어둠과 빛으로 번갈아 삼켰다.
청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진동은 바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제단의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제단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작은 심장 모양의 문양이었다. 그것은 붉은색으로, 맥동하듯 깜빡였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그리고 그 붉은 빛이 닿는 곳마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흙과 먼지에 가려져 있던 검은 금속 조각들이,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비늘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바닥의 흙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거대한 존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큭… 이것들이!”
청운은 즉시 소연을 등 뒤로 밀치고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땅속에서 솟아나는 것은 다름 아닌,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형태의 인형들이었다. 팔다리가 가늘고 길며, 날카로운 칼날이 손목과 발목에 박혀 있었다. 눈구멍은 텅 비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수십. 제단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며 솟아난 기괴한 인형들이, 천천히 청운과 소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고대 유적의 수호자들이에요…! 기록에는 언급만 되어 있었는데… 실존할 줄이야…!”
소연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화접등을 든 채 뒷걸음질 쳤다.
청운은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날이 화접등의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득였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의만이 깃들어 있었다.
“수호자든 뭐든… 길을 막는다면 베어버려야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앞선 인형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왔다. 날카로운 금속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청운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이곳은 침묵의 심장부가 아니었다.
절규와 피로 물들, 고대 병기의 무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