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끝을 찌르는 흙먼지의 비릿한 향이었다. 그리고 목구멍을 긁는 듯한 건조함. 숨을 쉬자 폐가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이 아닌, 온통 낯선 색감의 하늘이 시야를 채웠다. 잿빛에 가까운 희뿌연 하늘. 중앙에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거대한 구름 덩어리가 기이하게 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상처처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근육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등 뒤에는 딱딱하고 거친 것이 닿아 있었다. 겨우 상체를 세우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건물 잔해들. 무너져 내린 고층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찔렀다. 콘크리트 조각과 철근이 뒤엉켜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보는 듯했다. 멀리까지 이어진 폐허는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도시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흩날렸고, 찢어진 간판 조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절대.
“이게… 뭐야?”
메마른 입술 사이로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내 목소리인데도 낯설었다. 어제의 나는 분명 따뜻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었다. 출근 걱정에 뒤척이긴 했지만, 눈을 뜨면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폐허, 잿빛 하늘, 그리고 이 기이한 건조함.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꿈인가? 하지만 이 생생한 흙먼지 냄새, 거친 바닥의 감촉, 그리고 목마름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쥐었다. 거친 표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허망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쓰러져 있던 곳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버스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녹슨 철제 기둥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고, 먼지 쌓인 의자만이 겨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간판도 녹슬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하지만 당장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단 하나였다. 목마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살갗은 거칠고 갈라지는 것 같았다.
“물…”
몸을 일으키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주위를 살폈다. 물! 물을 찾아야 했다. 어디든 좋으니, 마실 수 있는 물. 폐허 속에서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몸을 이끌고 정류장을 벗어났다. 깨진 아스팔트 바닥은 열기로 가득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돌멩이들이 굴러다녔다.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건물 잔해 속에서 어떤 표지판 같은 것을 발견했다.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좌절일까?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향했다. 폐허가 된 도시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 잔해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내 거친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이 고요함이 더 무서웠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표지판이 있던 곳에 다다랐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녹슨 철제 구조물에 붙어 있던 안내판. 원래는 화려한 그림과 글자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부식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언어 같았다. 내가 알던 한글도, 영어도 아니었다. 그림처럼 생긴 글자들이었다.
안내판 아래에는 마치 거대한 도마뱀 발자국 같은 희미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이라기엔 너무 크고 불규칙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흔적은 대체 무엇이지? 동물? 아니면… 괴물?
목마름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우선 물을 찾아야 했다. 안내판 주위를 둘러보자, 부서진 건물과 건물 사이에 희미하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어쩌면 그 길 끝에 생명의 흔적, 하다못해 버려진 물통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그 길을 택했다.
햇볕은 점차 뜨거워졌다. 잿빛 하늘 한가운데 붉은 구름이 여전히 이글거리는 상처처럼 떠 있었다. 발이 아파왔다. 신발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이었다. 발바닥이 거친 바닥에 쓸려 따끔거렸다. 고통이 정신을 맑게 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여기에 던져졌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폐허 속에서 유난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외벽만큼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 옆, 녹슨 수도관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달려갔다. 찢어진 옷자락이 나부꼈다. 수도관 끝에는 녹슨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잡고 돌렸다. ‘끼이이익-‘ 끔찍한 쇳소리가 나더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았다. 허탈감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는 건가?
그때였다.
‘스스슥…’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도, 잔해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땅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얼어붙은 듯 몸을 굳혔다. 혹시, 아까 그 발자국의 주인일까?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기다란 형체가 스르륵 기어 나오고 있었다. 흙먼지색과 비슷한 피부에, 등에는 울퉁불퉁한 돌기가 솟아 있었다. 뱀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했다. 하지만 크기는 인간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 번뜩이는 붉은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 괴물을 응시했다. 괴물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본능적인 외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폐허는 단순히 죽음의 도시가 아니었다. 이곳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