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저무는 은하, 검은 비늘**
새벽녘, 안개가 자욱한 청룡산맥의 봉우리들은 마치 수묵화 속 신선의 그림처럼 아득했다. 백청아는 이 천지의 경계에 선 채,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영험한 기운을 느꼈다. 옥빛 도포 자락이 아침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고요한 수면 아래 감춰진 태고의 힘처럼, 그녀의 존재는 이 산맥의 정기와 함께 숨 쉬는 듯했다.
천계에서 내려온 이래, 청아는 오직 흐트러진 기운을 정화하고, 위태로운 균형을 바로잡는 일에만 전념해왔다. 특히 이 청룡산맥은 선계와 마계, 그리고 인간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이었다. 수많은 정령들과 미지의 존재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이곳은 늘 그녀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게 했다.
며칠 전부터 산맥 깊은 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비극적인 그 기운은 청아의 발길을 비취동굴로 이끌었다. 동굴 입구는 빽빽한 담쟁이덩굴과 거대한 바위들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안(靈眼)은 그 너머에 숨겨진 비밀을 꿰뚫어 보았다.
“꽤나 고집스러운 은신처로군.”
중얼거린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습기가 피부를 감쌌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가, 차가운 바위에 기댄 채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청아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는 검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창백했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 안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비범한 기세는 감출 수 없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마치 심연의 어둠을 담아낸 듯 검고 윤기가 흘렀으며, 그 끝자락에는 아주 미세하게 은빛 비늘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부러진 날개처럼 꺾인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흑룡족…’
청아의 심장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선계의 엄격한 가르침에 따라 흑룡족은 금기시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태초의 혼돈 속에서 태어나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그 성정 또한 거칠고 예측 불가능하여 선계와는 상종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특히 이토록 깊은 상처를 입은 흑룡이라면, 그야말로 잠자는 맹수와 다름없었다.
“누구냐….”
가느다란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짙은 어둠을 담은 그의 눈동자는 언뜻 보면 무감해보였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분노와 체념, 그리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함께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청아에게 닿자, 주변의 차가운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연못가의 물결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백청아. 이곳의 흐트러진 기운을 살피러 온 선인이다.”
청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기보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선인이라….”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인지 고통인지 모를 미소가 스쳤다.
“선인께서 이 더러운 곳까지 직접 납시셨다니. 용서하시옵소서. 제가 감히 선계의 존재를 모욕할 뻔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지만,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비록 조롱 섞인 말이었지만, 청아는 그 속에서 체념과 자조를 읽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찌하여 이리 깊은 상처를 입었는가?”
청아의 물음에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에 찬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더욱 바위에 깊이 파묻으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그의 어깨 부근, 찢어진 옷 안에서 검은 비늘들이 섬뜩하게 드러나 있었다. 흡사 거대한 짐승의 단단한 비늘 같았다.
가르침은 단호했다. 금기된 존재에게는 동정하지 말고, 섣불리 개입하지 말 것. 그들의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그들을 돕는 것은 결국 선계에 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아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토록 거대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존재에게, 어찌 쉬이 등 돌릴 수 있을까. 그의 눈동자 속 깊이 자리한 어둠은 마치 자신이 마주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졌다.
청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희미하게 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가까이 오지 마라… 더럽힐 뿐이다.”
“그대는 더럽지 않다.”
청아는 사내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 기운이 피어났다. 정화의 기운이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그의 어깨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손끝을 감쌌지만, 청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움 속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그의 피부에 닿으려던 찰나, 사내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일렁였다.
“내 이름은 묵연이다.”
그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 순간, 청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두 개의 이질적인 기운이 서로에게 이끌리듯,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두 종족의 금기는 이 차가운 비취동굴에서,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