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영겁의 요람, 첫 발자국
황량한 대지 위, 메마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녹슨 철골 구조물들이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에 잠겨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듯한 적막 속, 오직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먼지를 가르며 고요를 깨트렸다.
“여기가 맞을까요, 하준 씨?”
유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무너진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때는 무언가를 지탱했던 거대한 문이 녹과 이끼로 뒤덮인 채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 위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들이 마모된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강하준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텁텁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그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록에 따르면 여기야. ‘영겁의 요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흥분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잊혀진 유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폐허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안에 숨겨진 자원이나 정보를 발굴하는 것. 그것이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희망을 붙잡는 일이었다.
유진은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메며 문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은 빛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네요. 대격변 이후 모든 것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사라진 게 아니라, 깊숙이 숨겨졌던 거지.” 하준은 품속에서 낡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흐릿한 옛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지만, 이 땅 밑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던 거야. 이 고대 문명은 재앙을 예견하고 지하로 도시를 옮겼다고 전해져. 물론,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절벽 아래, 바위틈에 숨겨진 입구였다. 주변에는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로 굳어버린 금속과 돌덩어리들이 널려 있었는데,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멈춰 세운 듯했다. 으스스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날렵한 몸으로 문 옆의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쪽으로 통하는 작은 틈이 있어요! 아마도 부식된 곳 같아요.”
하준은 그녀를 따라 몸을 숙여 좁은 틈새로 들어갔다. 콘크리트와 흙먼지, 그리고 오래된 금속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좁은 통로를 따라 몇 미터를 기어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맙소사…” 유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준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휴대용 탐조등 불빛이 닿는 곳마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과 알 수 없는 용도의 구조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그 규모와 정교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벙커가 아니었다. 마치 또 다른 세계가 지하에 통째로 옮겨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게… 정말 고대 문명의 유적이란 말인가?” 하준은 중얼거렸다. 그가 알던 대격변 이전의 기술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진보한 형태였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알던 모든 지식이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매끄러운 금속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은은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이 닿는 순간, 바닥 깊은 곳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저것 좀 보세요!” 유진이 어둠 속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탐조등이 향한 곳에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빛바랜 색채였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림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금속 물체들, 빛을 내는 도시,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신비로운 존재의 형상.
하준은 벽화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차가운 벽에 그려진 문양들은 그들의 문자와는 전혀 달랐다. 원형과 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문양들… 제가 자료에서 본 적이 있어요.” 유진이 숨을 죽이며 말했다. “대격변 이전의 가장 오래된 기록들, ‘시원의 언어’라고 불리던 것이에요. 당시 학자들도 거의 해독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주변의 기계 장치들이 희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이잉…’ 하는 낮은 진동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울렸다. 먼지 쌓인 구조물 사이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거대한 벽화의 한가운데에 새겨진 문양이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준 씨, 이게 대체…” 유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준은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경계했다. 낡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젠장, 설마 자동 방어 시스템이라도 작동하는 건가?”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의 시스템이 그들의 발자국 소리 하나에 깨어난 것 같았다.
벽화의 푸른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그림 속의 신비로운 존재가 눈을 뜨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빛은 벽화 전체를 휘감더니, 중앙의 거대한 문양을 중심으로 한데 모였다.
‘콰앙!’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벽화 중앙의 문양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닫혀 있던 미지의 문이, 그들 앞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문 안쪽에서는 검은 심연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심연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수많은 별을 품은 듯 반짝이는 기계 장치였다.
“젠장, 이게 무슨… 함정일 리는 없을 테고.” 하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새로 열린 문 안쪽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비밀, 혹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유진은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하준을 돌아보았다. “하준 씨…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하준은 권총을 단단히 쥐었다. 그의 얼굴에는 결의에 찬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어? ‘영겁의 요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의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아니면 어떤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소리처럼. 그 소리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미지의 문 너머의 세계를 향해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마력이라도 지닌 듯했다. 새로운 모험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