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폐허의 도시를 가로질렀다. 류는 잔뜩 숙인 허리 아래로 망토를 더욱 바싹 여몄다. 부서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검게 솟아 있었다. 한때 번영을 구가했을 곳은 이제 거대한 묘지나 다름없었다. 눅진한 흙먼지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스멀스멀 피어올라 숨 쉬는 공기마저 탁하게 만들었다.
“젠장, 빌어먹을.”
류는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목 안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었고,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탓에 갈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배낭 속에는 이제 마른 육포 조각 몇 개와 식량 대신 무기가 더 많은 지경이었다. 무영도는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의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며칠 전, 그는 간신히 얻은 정보 하나를 쫓아 이곳, 과거 ‘철벽의 요새’라 불렸던 구역까지 흘러들어 왔다. 소문은 흐린 강물처럼 옅고 불확실했지만, ‘살아있는 물’이 있다는 한 줄기 희망에 그는 모든 것을 걸었다. 살아있는 물이라니. 이 죽음의 세계에서 그 단어만큼 달콤한 유혹은 없었다.
“소문은 보통 거짓말쟁이들의 혀끝에서 시작되지.”
류는 부서진 아치형 구조물 아래를 통과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폈다. 흙먼지에 뒤섞인 발자국, 찢겨나간 천 조각, 혹은 기이한 형체를 띠고 말라붙은 무언가. 모든 것이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썩 좋지 않았다.
새로운 흔적. 깊게 파인 바퀴 자국, 그리고 그 옆으로 선명하게 찍힌 낡은 전투화의 흔적들. 한두 명이 아니다. 적어도 다섯 명 이상.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이 부서진 아치 아래로 향했다. 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발자국은 흙먼지로 뒤덮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악의가 느껴지는 듯했다. 사냥꾼들. 이 세계의 가장 흔하고, 가장 잔인한 위협 중 하나.
류는 건물 잔해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의 경공술은 폐허 위를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게 했다. 한때는 강호를 유람하며 이름을 떨치던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굶주린 짐승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남은 물 한 모금을 위해, 썩어가는 고깃덩어리 하나를 위해 기꺼이 동족의 목을 베는 자들이었다.
이윽고,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얼룩덜룩했고, 뼈대가 드러난 채 쓰러져 있는 버스 잔해들이 흉물스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류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웅덩이.
그것은 바싹 마른 폐허 한가운데서 마치 기적처럼 고여 있는 물웅덩이었다. 빛바랜 콘크리트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은 흙탕물처럼 탁했지만, 그 희미한 움직임 속에서 알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살아있는 물’이라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기대감이 류의 심장을 세차게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직감적인 경고음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너무 완벽하다. 이토록 눈에 띄는 곳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쉬이이…”
류는 나지막이 숨을 내쉬며 자세를 낮췄다. 그의 감각이 곤두섰다. 부서진 버스 잔해 뒤편에서, 희미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렸다. 인기척. 그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의 움직임이었다. 사냥꾼들. 그들은 이 웅덩이를 미끼로 쓰고 있었다. 굶주린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한 지독한 함정.
류는 버스 잔해와 폐기물 더미를 덮고 있는 거대한 천막 조각 뒤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흙먼지 사이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들은 낡은 가죽 갑옷과 녹슨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숙련된, 그리고 잔인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매서웠고, 광기 어린 집착으로 빛났다.
“빌어먹을, 오늘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굵직한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이따위 흙탕물 가지고 누가 넘어오기나 한다고.”
“닥쳐.” 또 다른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제도 굶주린 놈 하나가 기어들어 왔다가 팔다리 잘리고 피 흘려 죽었어. ‘살아있는 물’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니, 곧 더 올 거야. 버텨.”
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팔다리를 자르고 피를 흘리게 했다고? 이 세계에서 인간성이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이들이 노리는 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의 몸을 뜯어내 얻는 잔혹한 쾌락, 그리고 그들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갈증은 여전했다. 그러나 류의 눈빛은 더욱 냉철해졌다. 저 웅덩이의 물은 마실 수 있을지언정, 그 대가는 너무나 비쌀 터였다. 그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사냥꾼들 몰래 물을 얻거나, 아니면 저들을 제거하고 물을 차지하는 것. 이 좁은 공간에서 사냥꾼들 다섯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지만, 류는 다른 무엇보다도 제 안의 굶주린 짐승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류는 배낭에서 투척용 비수를 꺼내 들었다. 칼날은 희미하게 달빛을 머금고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손목이 가볍게 비틀리는 순간, 비수 세 자루가 섬광처럼 어둠 속으로 날아들었다.
“크악!”
선두에 서 있던 사냥꾼 둘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목과 어깨에 비수를 맞고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비명은 적막한 폐허를 찢었다.
“누구야!”
남은 세 명이 허둥지둥 몸을 돌리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류는 그들의 눈이 미처 자신을 찾아내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튀어나갔다. 그의 무영도는 이미 손에 들려 있었고, 푸른빛 섬광을 그리며 어둠 속을 갈랐다.
*쉬이이익- 퍽!*
가장 가까이 있던 사냥꾼의 손목을 노린 칼날이 정확하게 뼈와 살을 갈랐다. 놈은 손에 쥔 녹슨 도끼를 놓치며 비명을 질렀다. 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 무영도를 거둬들일 틈도 없이 비수 한 자루를 뽑아 놈의 목에 박아 넣었다. 피가 울컥 솟아 올랐다.
남은 두 명은 순간적으로 전의를 상실한 듯 얼어붙었다. 류의 움직임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세 명을 제압해 버린 이 기묘한 침입자는,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 도망쳐!”
한 놈이 소리쳤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등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류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자들은 대개 더 큰 위협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웅덩이로 향했다.
흙탕물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그 존재는 마치 별 조각이 물속에 가라앉은 것 같았다. 류는 천천히 웅덩이로 다가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의 눈은 오직 그 빛나는 존재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을 뻗으려던 순간, 류의 발아래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우웅…*
낮고 굵은 진동은 처음엔 미미했지만, 이내 점점 더 커졌다. 웅덩이의 물이 파동을 치기 시작했고, 바닥에 고여 있던 흙탕물이 거칠게 흔들렸다. 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은 사냥꾼들의 발소리도, 바람의 움직임도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땅속에서 뛰는 듯한, 섬뜩한 울림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류의 눈앞에서 웅덩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푸른빛 섬광과 함께, 물속에서 검은 거품이 부글거리며 솟아올랐다. 거품은 이내 거대한 형상으로 변해갔다. 단단한 껍질과 날카로운 집게발을 가진 거대한 생명체. 그것은 마치 오래된 바다의 악몽이 흙탕물 속에서 부활한 듯한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거품이 걷히자 드러난 것은, 거대한 검은 게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갑각은 썩은 기름처럼 끈적거렸다. 놈은 거대한 집게발을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해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크으으아아아아!*
괴물의 울부짖음이 폐허 전체를 뒤흔들었다. 류는 무영도를 움켜쥐었다. 그는 이 괴물이 사냥꾼들의 미끼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물’이라는 소문은 결국 이 흉물을 깨우는 데 일조했을 뿐. 류는 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음을 부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 속에서, 류는 자신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위협을 직감했다.
땅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진동했다. 놈이 거대한 집게발을 휘둘러 류가 서 있던 곳을 향해 내리찍었다. 류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피했지만, 그의 뒤편에 있던 버스 잔해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폭발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류는 무영도를 고쳐 잡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살기 위해서는, 이 흉물을 베어야만 했다. 살아있는 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