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잿빛 도시의 그림자**

오후 세 시, 태양이 잿빛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지상을 비추는 시간. 서울의 잔해는 오늘도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이 뒤엉킨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엔 부서진 차량들과 폐기물들이 섬뜩한 조각상처럼 널려 있었다. 매연과 모래먼지가 섞인 공기는 폐부를 긁는 듯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오빠, 이거 안 열려.”

아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무릎을 꿇고 앉아 녹슨 철제 캐비닛을 붙들고 씨름하던 아리는 결국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열세 살, 아직 여린 몸이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야무지고 단단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흙먼지가 뒤섞여 있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빛만큼은 이 망가진 세상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비켜봐.”

지혁은 아리가 내민 몽키스패너를 받아들었다. 스패너는 그의 굳은살 박힌 손에 착 달라붙었다. 몇 년 전 ‘대파괴’ 이후로 그의 손은 늘 이런 공구나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는 캐비닛의 잠금장치를 유심히 살폈다. 녹이 슬어 거의 고철 덩어리가 된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용물이 기대됐다. 이런 폐허에서 캐비닛 하나 온전히 남아있다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

“후우….”

한숨을 내쉬고 캐비닛 틈새에 스패너를 깊숙이 박아 넣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비틀자, ‘끼이익’ 하는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억지로 벌어졌다. 쾌쾌한 먼지가 솟구치고, 그 안에서 몇 개의 캔과 낡은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아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두 개의 통조림 캔. 하나는 정체불명의 고기, 다른 하나는 콩이었다. 그 옆에는 방부 처리가 잘 된 건빵 봉지가 찢어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며칠 굶은 배를 움켜쥐고 있던 아리에겐 마치 황금이라도 발견한 듯 기쁨의 빛이 돌았다.

“대박! 오빠, 우리 오늘 포식하는 거야?”

아리는 작은 몸을 흔들며 신이 난 표정으로 묻어왔다. 지혁은 피식 웃었다. 포식이라니. 겨우 이 정도인데. 하지만 이 작은 발견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오늘 하루를,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아직 방심하긴 일러. 이런 곳에 이런 게 남아있다는 건….”

지혁은 말을 잇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잿빛 건물들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된 상점 건물이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갔고, 내부는 텅 비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다른 흔적은 없어?”

지혁의 말에 아리가 조심스럽게 캐비닛 안을 더듬었다. 캔과 건빵 아래, 낡은 천 조각에 싸인 뭔가가 손에 잡혔다. 그걸 꺼내자 녹슬고 때 탄 작은 철제 상자가 나왔다.

“이게 뭘까?”

아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잠금장치는 없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종이 한 장과 함께 손바닥만 한 단말기 하나가 들어있었다. 단말기는 전원이 꺼진 채였지만, 다이얼 부분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혁은 종이를 펼쳤다. 손으로 그린 듯한 조악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복잡한 지명 대신, 알 수 없는 기호와 함께 ‘숨겨진 보급소’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지도 한쪽 구석에는 낡은 글씨로 ‘동부 방벽 너머, 옛 군사 지구 폐쇄 구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급소? 진짜 보급소라면….”

아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급소는 이 세상에서 거의 신화 같은 존재였다.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보급소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설사 찾더라도 이미 다른 생존자 집단이나 약탈자들의 손에 넘어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너무 기대하지 마. 이런 낡은 지도는 수없이 봐왔어. 대부분은 헛수고였지.”

지혁은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살짝 동요하고 있었다. 동부 방벽. 오래전 대파괴 당시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그 너머는 ‘오염 지역’으로 불리며 발을 들이는 것조차 금지된 곳이었다. 군사 지구 폐쇄 구역이라면… 정말 뭔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끄르릉….’

낮게 깔리는 짐승의 소리. 지혁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리도 소리를 들은 듯 움찔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왔어….”

지혁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캔과 건빵을 재빨리 배낭에 쑤셔 넣고, 한 손에는 몽키스패너를, 다른 손으로는 허리춤에 찬 칼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건물 잔해 사이로, 네 발 달린 그림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변이체였다. ‘대파괴’ 이후 생겨난 흉측한 괴물들. 길고 앙상한 몸에 뻣뻣한 털, 기형적으로 발달한 앞발과 날카로운 이빨. 굶주림에 미쳐버린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광기에 번뜩였다. 보통은 무리 지어 다니는 놈들인데, 두 마리라면… 아직은 상대할 만했다.

“오빠…!”

아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렀다. 지혁은 아리의 등을 밀어 폐허가 된 상점 건물 안쪽으로 숨게 했다.

“절대 움직이지 마. 들키면 끝장이야.”

그는 낮게 속삭였다. 변이체들은 주변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지혁은 숨을 죽였다. 바람이 불어와 모래먼지를 실어 날렸다. 변이체들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젠장….’

이대로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놈들은 후각이 발달해 언제든 자신들의 위치를 알아낼 터였다. 지혁은 폐허의 지형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캔했다. 부서진 기둥, 날카로운 철근, 쓰러진 간판… 이용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때, 상점 건물 내부에서 얇은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아리가 실수로 뭔가를 건드린 것이다.

‘크르르릉!’

변이체들이 일제히 상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눈이 번뜩였다. 들켰다!

“뛰어!”

지혁은 아리의 손을 잡고 반대편 골목으로 내달렸다. 변이체들은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끈질기게 뒤를 쫓았다. 놈들의 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더 빨리!”

지혁은 폐허 속을 능숙하게 가로질렀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뛰어넘고, 부서진 벽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아리는 작은 몸으로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텅 비어버린 낡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었고, 출구는 그들이 들어온 골목 하나뿐이었다. 덫에 걸린 꼴이었다.

변이체들이 골목 입구를 막아섰다. 두 마리의 짐승이 그르렁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놈들의 이빨에서는 침이 흘러내렸다.

“젠장….”

지혁은 아리를 등 뒤에 숨기고 몽키스패너를 고쳐 잡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는 주차장 한쪽 구석에 쌓여 있던 낡은 철골 더미를 흘끗 봤다. ‘그래, 저거다!’

“아리! 저 철골 더미로 뛰어가!”

아리는 망설임 없이 지혁이 가리킨 곳으로 달려갔다. 변이체 한 마리가 아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리 와, 이 개자식아!”

지혁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다른 변이체의 시선을 끌었다. 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지혁은 날아오는 놈의 앞발을 가까스로 피하며, 몽키스패너로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놈이 휘청거렸다. 변이체의 뼈가 부러진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틈을 타 아리는 철골 더미 위로 재빨리 올라섰다. 녹슬고 뾰족한 철근들이 뒤엉켜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오빠, 저기!”

아리가 외쳤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주차장 천장에 매달려 있는 낡은 환풍구였다.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크기.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이 필요했다. 변이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몽키스패너 공격에 잠시 주춤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마리가 이미 철골 더미 아래에서 아리를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아리, 저 환풍구까지 내가 시간을 벌어줄게! 혼자 갈 수 있지?”

아리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응!”

지혁은 다시 변이체에게 돌진했다. 이번에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녹슨 칼날이 햇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한 마리는 철골 더미를 오르려 했고, 다른 한 마리는 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씩 상대한다!’

지혁은 자신에게 돌진하는 변이체의 머리를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놈은 몸을 비틀어 칼날을 피했지만, 그 틈에 지혁은 재빨리 놈의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렸다. 휘청거리는 놈에게 달려들어 칼을 다시 한번 깊숙이 찔러 넣었다. 놈의 비명과 함께 시커먼 피가 솟구쳤다.

그 사이 아리는 철골 더미를 밟고 환풍구 쪽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래에서 다른 변이체가 으르렁거리며 철골을 할퀴었지만, 아리의 손은 이미 환풍구 입구에 닿아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아리!”

지혁은 쓰러진 변이체를 확인하고, 남은 한 마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놈은 이미 아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혁을 노리고 있었다. 지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팔목이 욱신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젠 너다!”

지혁은 칼을 고쳐 잡았다. 놈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훨씬 민첩했다. 이빨을 드러내고 낮게 자세를 낮췄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싸움.

그는 놈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철근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좋아, 저거다!’

지혁은 일부러 도망치는 척하며 철근 쪽으로 놈을 유인했다. 놈은 광폭하게 돌진했고, 지혁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변이체는 제어력을 잃고 튀어나온 철근에 옆구리를 박았다. ‘끼이이익!’ 비명 소리와 함께 철근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하아… 하아….”

지혁은 피투성이가 된 변이체를 확인하고 겨우 한숨을 돌렸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일단 살았다.

“오빠!”

아리의 목소리가 환풍구 안에서 들려왔다. 지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아리는 이미 환풍구 안으로 몸을 집어넣은 상태였다.

“이쪽이야! 길 있어!”

지혁은 힘겹게 철골 더미를 기어 올라갔다. 피와 흙먼지로 뒤범벅이 된 몸이었다. 환풍구 입구에 다다르자, 아리가 그를 도와 안으로 이끌었다. 좁고 어두운 통로였지만, 바깥의 위험보다는 훨씬 나았다.

“젠장, 아슬아슬했다.”

지혁은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리는 그의 옆에 앉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오빠, 괜찮아?”

“괜찮아. 너는?”

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괜찮아.”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죽은 변이체들의 시체를 노리는 다른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지혁은 아까 발견한 낡은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보자, 놀랍게도 화면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삐익-‘

낡은 인터페이스가 로딩되더니, 아까 지도의 일부가 화면에 나타났다. 지혁은 단말기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단순한 지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좌표와 함께 알 수 없는 데이터들이 깜빡였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작은 글씨로 ‘프로젝트 명: 마지막 희망’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마지막 희망?”

아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글쎄. 미끼일 수도 있고….”

지혁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동부 방벽 너머, 옛 군사 지구 폐쇄 구역’은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위험한 여정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보급소라는 단어가 그의 마음을 계속 맴돌았다. 이 지긋지긋한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 거야, 오빠?”

아리가 물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결심한 듯 빛나고 있었다.

지혁은 낡은 단말기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밖은 여전히 암흑과 위험으로 가득했지만, 이 작은 단말기는 미지의 빛을 비추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단말기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준비해, 아리.”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우리, 동부 방벽으로 간다.”

환풍구 너머의 잿빛 도시는 이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한 거대한 미로가 되어 있었다. 과연 그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일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