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낡은 로딩 창이 깜빡이며 사라지자, 김민준의 시야에 ‘황혼의 땅’이 펼쳐졌다. 언제나처럼, 황량하고, 잿빛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텅 빈 건물들의 뼈대 사이를 휘감으며 으스스한 울음을 토해냈다. 한때는 번화했을 도시의 잔해가 지금은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민준은 익숙하게 캐릭터의 체력 바와 생존 지표를 확인했다. [체력: 85%], [허기: 70%], [갈증: 45%]. 갈증이 문제였다. 어제 겨우 찾아낸 오염된 물을 정수 필터로 걸러 마신 게 전부였다. 오늘은 깨끗한 물, 아니 하다못해 정수 가능한 물이라도 찾아야 했다. 며칠 전부터 지도에 찍어둔 ‘구 시가지 지하수 처리 시설’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젠장, 오늘도 재수가 없으려나.”
낮게 중얼거리며 민준은 낡은 철제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주 무기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물건이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생존자들을 살렸고, 또 죽였다. 그의 등 뒤에는 빛바랜 배낭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긁어모은 잡동사니들이 달그락거렸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폐허가 된 상업 지구였다. 부서진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렸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로 녹슨 차량들이 뼈대만 남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게임 속에서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부주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죽음은 단순한 리스폰이 아니었다. 소지품 대부분을 잃고, 멀리 떨어진 거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지독한 페널티. 때로는 한 달 넘게 모은 자원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민준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현실도, 게임 속도 모두 지독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오른편에 쓰러져 있는 버스의 잔해를 살피던 중, 불현듯 섬뜩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키이이이잉…’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잔해 뒤에 숨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시야를 좁혀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저 멀리, 뭉개진 고가도로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철 집게벌레’였다. 두꺼운 강철판으로 뒤덮인 몸통에, 낫처럼 날카로운 집게발을 가진 이 괴물은 폐허를 돌아다니며 고철을 수집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두 동강 내버리는 흉악한 존재였다. 체력도 높고 공격력도 상당해 혼자서는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하필 지금….”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피해야 했다.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헛된 죽음을 맞을 뿐이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집게벌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다행히 놈은 민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가도로 아래의 부서진 구조물들을 뜯어내느라 바빴다.
민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에 부서진 파편이라도 밟아 소리를 낼까 두려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겨우 집게벌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폐허 속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위협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한참을 달려 겨우 낡은 빌딩의 붕괴된 입구 안으로 몸을 숨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체력: 82%]. 달리느라 체력이 조금 소모되었다. 목은 더 말랐다.
“망할….”
고철 집게벌레는 그의 경로에 없던 변수였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지하수 처리 시설로 가기 위해서는 이 빌딩을 관통하거나, 더 멀리 우회해야 했다. 민준은 배낭에서 낡은 태블릿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다. 이 빌딩 안쪽은 지도로도 잘 표시되지 않는 미탐사 구역이 많았다. 위험했지만, 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빌딩 내부는 외부보다 더 어둡고 퀴퀴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곳이 많았고, 내부 구조물들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좁아지자, 청각과 후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툭.
발밑에서 무언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민준은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 사이로, 마른 뼈가 흩어져 있었다. 사람의 뼈였다. 오래전에 죽은 누군가의 흔적. 이 폐허의 수많은 비극 중 하나였다.
민준은 뼈를 피해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조각을 포착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얇은 은색 금속판이 드러났다. ‘정화된 물’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캡슐 조각이었다. 이미 내용물은 오래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누군가 이곳에서 물을 찾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아니면 물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씁쓸한 기분이 민준을 감쌌다. 게임 속의 죽음이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절망이 폐허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는 캡슐 조각을 주워 배낭에 던져 넣었다. 혹시 모를 고철 자원이 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사소한 조각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철컥… 삑….”
갑자기 민준의 왼편 벽에서 작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파이프를 치켜들었다. 벽면의 부서진 통로 안쪽에서 어렴풋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투박한 금속 다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사 드론’이었다.
다행히 전투형은 아닌 듯 보였다. 작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정찰 드론이었다. 하지만 이 드론이 민준을 발견하고 알람을 울리면, 근처에 숨어있는 다른 위협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민준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드론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드론은 낡은 벽면을 스캔하듯 움직이며 민준이 숨어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피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민준은 단호하게 드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짧은 거리, 그는 파이프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쾅! 날카로운 금속 충격음과 함께 드론이 파편을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푸른 스파크가 튀면서 드론은 곧 정지했다.
[탐사 드론 파괴!]
[전투 경험치 획득!]
[부품: 손상된 광학 센서(1), 전선 뭉치(2) 획득!]
나쁘지 않은 수확이었다. 민준은 드론의 잔해를 대충 훑어보고 필요한 부품들을 챙겼다. 하지만 이 소란으로 인해 주변의 다른 생존자들이나 변이체들이 그의 위치를 파악했을 수도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민준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낡은 계단을 밟고 지하로 향했다. 그의 목표, 지하수 처리 시설은 분명 이 아래에 있을 터였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습하고 차가워졌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이 냄새….”
그것은 희망의 냄새였다. 지하층에 도착하자, 더욱 짙어진 어둠 속에 거대한 금속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고 녹슨 철문 위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구역 4 – 수처리 시설 (非인가 접근 금지)]
민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겨우 이곳까지 왔다. 이제 문만 열면 됐다. 그는 배낭에서 낡은 만능 해킹 장비를 꺼내 문 옆의 제어판에 연결했다. 장비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복잡한 암호 해독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5분, 10분…. 그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드디어,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제어판에 [접근 허가]라는 녹색 글자가 떴다. 묵직한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너머로 깊은 어둠과 함께, 물이 흐르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은 낡은 손전등을 켜고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들과 거대한 금속 설비들을 비췄다. 그리고 저 멀리, 축축한 바닥 위로 희미하게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나는, 생명의 물이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었다. 절망적인 폐허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냈을 때의 안도감과 성취감. 게임 속에서의 생존이 곧 삶의 이유가 되는 이 기묘한 세계에서, 민준은 오늘도 한 발짝 더 살아남았다. 아직 이 물을 정수하고, 안전하게 거점으로 운반해야 하는 난관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폐허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은,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