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새벽, 움직이는 찻잔
유진은 늘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깼다. 도시의 새벽은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고층 아파트 창밖으로는 아직 잠들지 못한 몇몇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숲 속, 자신의 작은 보금자리. 스물아홉의 유진에게 이곳은 팍팍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유진은 늘 그랬듯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발바닥에 닿는 나무 마루의 차가운 감촉이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컵이 놓인 선반을 열고, 늘 쓰던 머그컵을 꺼내려는데, 이상했다. 어제 분명 싱크대 옆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예쁜 푸른색 꽃무늬 찻잔이, 웬일인지 식탁 한가운데, 그것도 컵 받침 위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어… 내가 밤새 물이라도 마셨나?”
유진은 잠결에 자신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건망증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 피곤해서 깜빡했을 수도 있지.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푸른색 찻잔을 들어 물을 채웠다. 물을 마시고 난 뒤, 찻잔은 제자리인 건조대로 돌아갔다.
출근 준비는 기계적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화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눈썹이 미묘하게 짝짝이인 것 같아 유진은 작은 눈썹 브러시를 찾았다. 분명 어제 밤, 화장대 서랍 두 번째 칸, 맨 앞에 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런데 서랍을 열어보니, 브러시는 온데간데없고, 웬일인지 세 번째 칸, 그것도 거의 안쪽에, 립스틱들 사이에 툭 던져져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진짜 요즘 내가 좀 이상한가?”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브러시를 사용한 기억도, 다른 칸에 넣어둔 기억도 없었다. 잠시 멍하니 브러시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곤해서 착각했겠지’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을 다독였다. 바쁜 현대인의 삶은 늘 이런 사소한 착각들을 동반하는 법이었다. 그녀는 짝짝이 눈썹을 겨우 수정하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서 점심시간. 늘 그렇듯 동료들과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고, 유진은 잠깐 옥상으로 올라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유진은 문을 열자마자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분명 아침에 가지런히 벗어두었던 신발이, 현관문 바로 앞에 엉뚱하게 가로로 놓여있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벗어 던진 것처럼.
“내가 이렇게 정신없었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신발을 바로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은 고요했다. 그런데,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에, 아침에 건조대에 올려두었던 푸른색 꽃무늬 찻잔이, 또다시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컵 받침도 없이, 덩그러니.
유진은 멈칫했다. 아침에 잠깐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광경을 다시 마주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분명 찻잔을 건조대에 두었고, 회사에 있는 내내 집에는 아무도 없었을 터인데. 보일러와 가스, 전등은 모두 끄고 나왔었다.
“설마… 도둑?”
재빨리 집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은 모두 닫혀있었고, 문이 부서진 흔적도 없었다. 값나가는 물건이 사라진 흔적도 없었다. 그저 찻잔 하나가 제자리에 있지 않을 뿐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찻잔에 다가갔다. 차갑고 매끄러운 푸른색 표면.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찻잔이 테이블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1센티미터쯤 스르륵 움직였다.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눈을 비볐지만, 찻잔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 봐.”
애써 애써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 무언가가, 알 수 없는 힘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듯했다. 마치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것처럼.
그날 밤, 유진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거실에서 환한 불빛이 침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유진은 벌떡 일어났다. 분명 모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보일러와 가스뿐만 아니라, 모든 전등 스위치를 끄고 나왔던 아침처럼.
“누구…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거실의 불빛만이 고요한 밤을 가르고 있었다.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침실 문고리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갑게 느껴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거실은 예상대로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환한 불빛 아래, 유리 테이블 위에는 아까 그 푸른색 꽃무늬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찻잔 안에, 마치 누군가 따뜻하게 마시고 남긴 것처럼, 짙은 갈색의 차가 조금 담겨 있는 게 아닌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컵 자체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 마시다 멈춘 듯한, 그런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찻잔 옆에는, 아침에 그녀가 애타게 찾았던 눈썹 브러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선물처럼.
유진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이건 착각도, 피로도 아니었다. 분명, 이 집에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혹은… 그냥 장난을 치고 있거나.
어둡던 밤, 홀로 켜진 거실 불빛 아래, 푸른 찻잔과 눈썹 브러시가 유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부터, 과연 유진의 아파트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