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그림자를 밟듯 움직였다. 그의 존재는 숲 속의 어둠에 완벽히 동화되어, 옅은 달빛조차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찌르듯 파고들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약속 장소, 잊혀진 실바인 신전의 폐허가 눈앞에 나타났다.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신전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자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아리아.”
그가 뱉은 낮은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그러나 신전 안에서 들려온, 그보다 더 희미한 발소리가 그 부름에 답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마법진을 통과했다. 짙은 안개와 이끼 낀 돌기둥 사이, 흐릿한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렌족 특유의 은빛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뽐냈고, 숲의 눈을 닮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그를 보자마자 깊은 안도와 애틋함을 담아 일렁였다.
“이안.”
그녀의 목소리는 숲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갈망이 서려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숲의 기운과 그녀 자신의 따스함이 차가웠던 그의 심장을 녹이는 듯했다.
“늦어서 미안해. 감시가… 더 삼엄해졌더군.” 이안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인간 영지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언제나 살얼음판이었다.
아리아는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알아. 나도 쉽지 않았어. 족장님의 눈이 매서워지셨어. 인간과의 교류를 금하는 법도가 더 강화될 거래.”
이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들이 우리를 눈치챈 건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저 족장님께서 현세에 불어닥친 혼돈을 우려하실 뿐이야.” 아리아는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우리의 숲을 파괴하고, 우리는 그들의 영지를 야만인이라 부르며 경멸하지. 이런 증오 속에서… 우리의 만남은 금지될 수밖에 없어.”
그들의 사랑은 태초부터 대립하던 두 종족의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인간과 아렌족. 하나는 문명을 숭상하며 확장하려 했고, 다른 하나는 자연을 숭배하며 고립을 택했다. 이안은 아렌족에게 ‘숲을 더럽히는 침략자’였고, 아리아는 인간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형의 존재’였다.
이안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난… 너를 포기할 수 없어, 아리아.”
아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안.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에게 이끌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이안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몰래 만날 수 있을까? 불안해.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였다.
파스스스, 숲의 나뭇가지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소리. 그것은 바람의 장난이 아니었다. 이안의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림자를 다루는 그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숨어.” 이안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손이 아리아를 감싸 안아 신전의 무너진 벽 뒤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이안의 몸은 짙은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는 듯 사라졌다. 폐허 곳곳에 드리워진 어둠이 그의 존재를 완전히 감췄다.
철컥, 철컥.
무거운 가죽 갑옷과 금속 부츠가 돌과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셋, 아니 넷. 아렌족 순찰대가 분명했다. 그들의 시야는 인간보다 훨씬 예리했고, 숲의 기운을 읽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이안은 자신의 숨결마저 조절하며 완벽한 어둠이 되려 애썼다.
“이곳에… 미약하지만 낯선 기운이 감지된다.”
순찰대원의 낮은 목소리가 폐허를 울렸다. 그들의 무기는 이미 뽑혀 있었고,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득였다.
“인간의 흔적은 아니지만…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 같습니다, 대장님.”
“안개를 걷어내라. 사방을 철저히 수색한다. 족장님의 명령이다. 어떠한 이형의 존재도 영지 깊숙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강화하라셨다.”
이안은 벽 뒤에 숨은 아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빛 속에는 체념보다는 강한 결의가 비쳤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이안은 직감했다.
아리아는 손을 뻗어 바닥에 쓰러진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숲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행위였다. 위험하다. 아렌족 순찰대원들이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동족의 마나 흐름에는 매우 민감했다.
“안 돼.” 이안은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들킨다.
하지만 아리아는 이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푸른빛을 점차 강하게 모아나갔다. 이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가 하려는 일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폐허를 감싸고 있던 희미한 안개가 갑자기 짙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숲 자체가 기지개를 켜듯, 마나의 파동이 폐허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 무슨…! 갑자기 마나가 요동친다! 경계해라!” 순찰대장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아리아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미안함과 동시에 깊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입모양을 만들었다. ‘도망쳐.’
이안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좌절감에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나를 폭발시키면, 순찰대원들은 틀림없이 그 진원지를 파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이안…!”
그 순간,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폐허를 뒤흔들며 폭발했다. 푸른빛 섬광이 어둠을 잠시 갈랐고, 그 빛은 순찰대원들의 시야를 멀게 했다. 동시에 강력한 바람이 불어닥치며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숲의 마법이었다. 아리아가 온 힘을 다해 시야를 가린 것이었다.
“흩어져! 진원지를 찾아라!” 순찰대장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망설였다. 그의 본능은 아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보호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도망쳐’라는 무언의 명령은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여기서 함께 잡히는 것은 파멸이었다. 적어도 한 명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했다.
이안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그의 그림자를 이용해, 눈 깜짝할 새 신전의 가장 깊숙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순찰대원들이 미처 그를 발견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폐허 밖 숲의 심장부로 향하고 있었다.
“찾았다! 이곳이다! 마나의 잔류가 가장 강한 곳!”
이안은 뒤에서 들려오는 순찰대원들의 외침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리아. 그녀는 잡힐 것이다. 아니, 이미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의 심장이 칼로 찢기는 듯 아팠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숲의 나무들이 거대한 감옥처럼 그를 둘러쌌지만, 그의 눈앞에는 오직 아리아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숲을 빠져나온 그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맹렬한 분노가 그의 내면을 지배했다. 그는 결코 아리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로 그녀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는 반드시 그녀를 되찾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이 게임의 모든 룰을 깨고, 두 종족의 전쟁을 촉발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차갑게 빛나는 붉은 달이 밤하늘에 외롭게 떠 있었다. 그 달빛 아래, 이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복수와 사랑의 맹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