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이 휘몰아치는 설산 깊은 곳, 천하제일 무림대회가 열리는 천황전(天荒殿)은 비장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천하의 운명을 가를 천하검(天下劍)의 주인을 가리는 자리. 쟁쟁한 고수들이 겨루고 또 겨루어 마침내 두 명의 영웅만이 결승에 남았다.
한 명은 북해의 얼음 바다에서 검을 닦았다는 흑룡검제(黑龍劍帝), 강철 같은 의지와 흑룡 같은 검강을 휘두르는 사내. 다른 한 명은 그림자처럼 홀연히 나타나 무영(無影)의 경지를 선보인 무영도객(無影刀客), 그의 칼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었다.
나는 그저 이름 없는 검수, 청운(靑雲)이었다. 십 년 전, 일가족이 억울하게 몰살당했을 때, 스승님께서 내 손에 쥐여 주신 낡은 검 한 자루와 “진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는 한마디를 품고 이곳까지 흘러왔을 뿐이다. 비록 결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곤 했다.
결승전 전야, 천황전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새벽녘,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흑룡검제께서 쓰러지셨다!”
그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흑룡검제는 자신의 숙소에서 피를 토한 채 발견되었고, 의식은 혼미했다. 명문 구파의 문주들과 천황전의 수호자들은 일제히 경악하며 그의 숙소로 달려갔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숙소는 아수라장이었다. 흑룡검제의 얼굴은 푸르죽죽했고, 그의 주변에는 알 수 없는 검은 토사물이 흩뿌려져 있었다.
“독이다! 맹독이다!”
구파 중 한 명인 곤륜파의 장문인, 백호 장문이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교차했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영도객에게로 향했다. 그는 유일한 경쟁자였고,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그의 기술은 이런 짓을 저지르기에 가장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무영도객은 천황전의 심문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흑룡검제가 쓰러져 있는 침상 옆,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약차가 담긴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두 개의 빈 찻잔이 더 있었다. 다과를 나누었던 흔적이었다. 약차에서 독이 검출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그 약차가 범인인 셈이었다.
“누군가 흑룡검제를 찾아와 약차를 권했고, 그는 그걸 마셨군.”
백호 장문이 읊조렸다. “허나 대체 누가… 이 철통 같은 경비망을 뚫고 흑룡검제의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때, 검증단이 약차를 마실 때 사용된 찻잔을 들고 나왔다. 찻잔에는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설화차(雪花茶)의 향이로군요. 지리산 깊은 곳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재인데… 독과 섞여 있으니 향이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명문 문파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이 말했다.
나는 방 바닥을 응시했다. 무언가 반짝였다. 손을 뻗어 집어 올리니, 작고 정교한 은장식이 박힌 머리핀이었다. 숙소에 남자가 아닌 여인이 방문했다는 증거였다. 흑룡검제는 평소 여인과 교류가 없었고, 지독한 수련으로 유명했다.
“여인이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범인이 무영도객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지만, 이 머리핀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무영도객은 그림자 같아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머리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영도객은 범인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려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틈새도 보이지 않았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흑룡검제만이 열 수 있었다. 외부인이 침입했다면 무력으로 문을 부쉈거나, 내부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문득, 내 시선이 흑룡검제가 토해낸 검은 토사물에 닿았다. 독은 분명했지만, 그 색깔이 묘하게 낯설었다. 내가 아는 맹독은 대부분 피를 붉게 물들이거나, 피부를 검게 태우는 종류였다. 이처럼 끈적한 검은색 토사물은…
“백호 장문께서는 아까 이 독이 ‘맹독’이라고 하셨죠?” 내가 불쑥 질문했다.
백호 장문은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렇다. 의원들도 그리 진단했다. 치사량이 높은 맹독이다.”
“허나 흑룡검제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혼수상태이긴 하나, 숨은 붙어 있고요.”
“그것은 흑룡검제의 내공이 워낙 깊어 독을 일부 이겨내고 있는 탓이겠지.” 백호 장문이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직감은 계속해서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속삭였다.
나는 조용히 흑룡검제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 묻은 토사물 중 일부가 마르면서 미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덜어내어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의 출처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독이 아니었다. 적어도 맹독은 아니었다.
그것은… 묵룡석(墨龍石)을 갈아 만든 가루였다. 묵룡석은 북해 깊은 곳에서 채취되는 광물로, 심신을 안정시키고 내공 수련에 도움을 주지만, 과다 복용 시 극심한 무력감과 구토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독으로 오해받기 쉬웠다.
묵룡석. 북해. 흑룡검제.
그의 별호에 ‘흑룡’이 들어가는 이유 또한 북해와 닿아 있었다. 흑룡검제는 북해 출신이었고, 묵룡석은 북해에서만 나는 특산품이었다.
“범인은 흑룡검제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이것은 묵룡석 가루입니다. 맹독으로 위장했을 뿐, 흑룡검제를 기력 쇠진으로 만들어 결승전에 나설 수 없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겁니다.”
백호 장문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허나 왜 그런 짓을…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자겠죠.” 내가 머리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 머리핀은, 여기 있는 누구도 착용하지 않는 종류입니다.”
내가 머리핀을 들어 보이자, 구파의 문주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의복에는 그런 장식이 없었다.
“이것은… 천황전의 시녀들이 착용하는 머리핀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그제야 한 명의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머리에는 머리핀이 없었다.
“이 시녀는 어제 흑룡검제의 숙소에 약차를 가져다준 자입니다. 그리고 설화차는… 구파 중 하나인 백호 장문의 곤륜파에서 귀빈 접대에 사용하는 차입니다.”
나는 백호 장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모든 일은, 흑룡검제를 제거하고, 동시에 무영도객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 후, 결승전은 취소되고, 천하검은 대회의 주최인 구파의 손에 넘어가게 되겠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묵룡석은 북해에서 납니다. 흑룡검제만이 그 특성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외부인이라면 이토록 정교하게 묵룡석을 맹독으로 위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독은… 흑룡검제 자신만이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독입니다.”
침묵이 천황전을 짓눌렀다. 내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흑룡검제 자신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백호 장문이 격분하여 외쳤다. “흑룡검제는 이 대회에서 가장 천하검을 원하던 자다!”
“진정 원했다면, 그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자신이 독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되어 천하의 동정을 사고, 그 후 천하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을 얻으려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영도객은 살인 미수범으로 몰려 제거될 것이고, 대회는 파행을 맞겠죠. 구파의 문주들이 천하검의 보관을 주장할 명분이 생기고요. 물론,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 흑룡검제가 죽는 상황도 고려했을지 모르지만요.”
나는 흑룡검제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는 검은 잉크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이런 상황을 만들려 했을 겁니다. 이 잉크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를 쓰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모두의 시선이 흑룡검제에게 향했다. 그때, 흑룡검제가 미세하게 몸을 떨며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내 눈빛과 마주치자 번뜩 빛이 났다.
“청운… 그대는… 진실을… 보았군…”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또렷했다.
“백호 장문… 그는… 내게… 천하검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백호 장문의 얼굴은 이제 핏기마저 사라져 백지장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녀는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 모든 것이 백호 장문과 흑룡검제의 합작이었음이 드러났다. 백호 장문은 흑룡검제가 우승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흑룡검제는 이를 역이용하여 백호 장문의 비리를 폭로하고 스스로 천하의 영웅이 되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영도객에게 누명을 씌울 계획이었다.
천하검을 탐하는 자들의 추악한 욕망이, 이렇게 끔찍한 연극을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면, 눈에 보이는 대로 ‘독살 미수’와 ‘경쟁자의 범행’으로 모든 것이 결론 나고 말았을 터였다.
결국, 백호 장문은 구파 문주들의 합의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천황전의 시녀는 투옥되었다. 흑룡검제는 목숨을 건 계획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요양해야 했지만, 그의 명성은 오히려 하늘을 찔렀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는 잠시 중단되었고, 천하검의 진정한 주인을 가리는 일은 다음 대회를 기약하게 되었다.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후, 나는 천황전의 차가운 돌바닥에 서 있었다. 무영도객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 같은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그대는… 꽤 흥미로운 검수군.”
그는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처음으로 그의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고 인간적이었다.
“다음 대회에는, 그대의 검과 진실을 보는 눈이 천하검을 마땅히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진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습니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낡은 검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비단 무술의 경지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기만과 음모를 꿰뚫어 보는 지혜였음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낡은 검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걷어낼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