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시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잿빛 모래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폐허 속을 걷는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 위로 희미한 자국만을 남겼다. 몇 년 전 ‘대붕괴’ 이후로 세상은 이렇게 변했다. 하늘은 언제나 희뿌연 회색이었고,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잔해들은 그저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낡은 가죽 배낭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닳고 닳아 너덜해진 천 조각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른 풀이 스치는 소리와 비슷하게 삐걱거렸다. 한 손엔 녹슨 단검이 들려 있었다. 칼날은 본래의 날카로움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최후의 방어 수단이라는 위안만큼은 남겨두고 있었다. 목은 갈라질 듯 말랐고, 허기보다 더 지독한 갈증이 그의 온몸을 옥죄어왔다. 입안은 사막처럼 건조했고, 혀는 모래로 뒤덮인 듯 꺼끌거렸다.
“젠장… 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어제 밤, 마지막 남은 물통이 바닥을 드러냈다.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텅 빈 물통은 시온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대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그는 이미 며칠째 제대로 된 식수를 구하지 못했다. 잿빛 세상의 물은 대부분 오염되었거나, 존재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시온은 기억을 더듬었다. 대붕괴 이전, 이곳은 ‘푸른 도시’라고 불렸던 번화가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잡초마저 말라붙은 모래 언덕만이 남아있지만, 어쩌면…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이게 마지막 희망이야.”
메마른 입술을 씹으며 시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폐허가 된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무너진 고층 빌딩의 잔해들이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잿빛 하늘을 찔렀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 파편들과 콘크리트 조각들이 밟혔다.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와 그의 눈을 따갑게 했다.
그때였다. 시온의 눈에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무너진 벽 뒤편에서 움직이는 그것은, 이 잿빛 세상의 가장 흔하고도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변이체’.
시온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주저앉아 폐허 더미 속에 몸을 숨겼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쿵, 쿵, 쿵. 마치 흙먼지 속에서 들려오는 저 변이체의 발소리처럼 불규칙하게 울렸다. 놈은 잿빛 모래색과 거의 흡사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여덟 개의 날카로운 다리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더듬었다. 이름 없는 벌레가 거대하게 변이된 듯한 모습. 놈의 등딱지에는 기괴한 붉은색 무늬가 번개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들키면 끝장이다. 저 녀석들은 사람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집요하게 쫓아오는 굶주린 그림자들이다. 놈은 잠시 시온이 숨은 곳을 향해 더듬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스르륵 몸을 움직여 폐허 사이로 사라졌다. 놈의 움직임은 모래바람에 섞여 희미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시온은 십수 분이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무너진 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하아… 하아….”
갈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물을 찾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희미하게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구조물을 발견했다. 무너진 건물들의 틈새, 흙더미에 반쯤 파묻힌 그것은 한때 웅장했을 법한 분수대 터였다. 조각된 천사상은 얼굴의 절반이 깨져나갔고, 물이 뿜어져 나오던 입구는 흙먼지로 막혀 있었다.
“여기인가….”
시온의 눈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물은 보이지 않았다. 흙더미와 잔해들만이 분수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때, 흙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햇빛이 반사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듯한, 물기 어린 빛깔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시온은 단검을 뽑아 들고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톱 밑에 흙이 박히고, 손바닥은 까슬한 돌멩이에 쓸려 쓰라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찾는 듯 필사적이었다.
이윽고, 그의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더 깊이 파헤치자, 금이 간 파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파이프의 갈라진 틈 사이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녹물처럼 탁하고, 진흙이 섞여 불순물이 가득한 물이었지만, 이 순간 시온에게는 그 어떤 생명수보다도 귀한 존재였다.
“찾았다….”
메마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온은 배낭에서 겨우 구겨지지 않은 낡은 천 조각을 꺼내 파이프 아래에 받쳤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물은 더디게 차올랐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풍요로워진 듯했다. 작은 물통에 몇 모금이라도 마실 수 있는 양을 모으는 동안, 그는 심장이 터질 듯한 희열을 느꼈다.
대략 절반쯤 물통이 찼을 때였다. 시온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인 경고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아까 폐허 사이로 사라졌던 변이체. 놈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과 십여 걸음 떨어진 거리. 놈의 몸이 점차 모래와 섞여 희미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놈은 사냥감을 찾아낸 굶주린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며, 공격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렸다. 놈의 입에서는 쉭쉭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시온의 귀를 때렸다.
“젠장….”
시온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고쳐 쥐었다. 아직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 물통을 단단히 품에 안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 물을 마셔야 했고,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등 뒤로 보이는 파이프에서 여전히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다시 한번 삶으로 이끄는 듯했다.
변이체가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놈의 그림자가 시온의 발치를 덮쳤다. 차가운 바람이 폐허 사이를 가로질렀다. 시온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탁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아리게 만들었다. 그는 놈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덤벼 봐. 이 벌레 같은 놈아.”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삶의 갈증과 죽음의 공포가 뒤섞인, 잿빛 세상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