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수에게 이사는 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낡은 원룸의 퀴퀴한 냄새와 작별하고 드디어 얻은 이 ‘내 집’은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였다. 햇살 가득한 거실, 미니멀한 주방,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함. 숨을 고르고 벽에 기댄 지수는 미소 지었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첫 번째 사건은 자그마치 일주일 만에 발생했다.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세면대로 향한 지수는 경악했다. 칫솔이… 칫솔이 변기통 안에 빠져 있었다. 그것도 칫솔모가 바닥을 향한 채,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넣어둔 것처럼.

“맙소사! 내가 꿈을 꾼 건가?”

지수는 밤새 몽유병에 걸렸나 생각하며 찝찝한 기분으로 새 칫솔을 꺼냈다. 그저 해프닝이라고, 잠결에 실수했을 거라고 치부했다.

두 번째 사건은 좀 더 드라마틱했다. 주말 오후, 거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드라마를 보던 지수는 목이 말라 냉장고로 향했다. 시원한 탄산수를 꺼내 마시며 다시 소파로 돌아왔을 때, 드라마가 재생되고 있던 노트북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내가 닫았나?”

기억에 없었다. 심지어 화면보호기도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지수는 흠칫했지만, 이내 ‘건망증이 심해졌군’ 하고 넘겼다. 워낙 바쁜 한 주였으니까.

세 번째 사건부터는 도저히 건망증으로 돌릴 수 없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아침, 다림질을 마친 셔츠가 사라졌다. 온 방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른 셔츠를 입고 현관을 나선 지수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현관문 바로 앞에, 어제 다림질을 마친 그 셔츠가, 마치 택배 상자처럼 깔끔하게 접힌 채 놓여 있는 게 아닌가. 그 위에는 작고 예쁜 나뭇잎 하나가 앙증맞게 얹어져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등골이 오싹했지만, 동시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건가? 아니면 혹시…?

그날 이후, 기이한 일들은 일상이 되었다. 화장대 위 립스틱이 사라졌다가 침대 발치에서 발견되거나, 건조기에 돌린 양말들이 제 짝을 잃은 채 욕실 바닥에 뒹굴거나, 심지어는 냉장고 속 식초가 간장으로 바뀌어 있는 일까지! (이때는 김치찌개 망쳐서 대성통곡했다.)

지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칠까? 범인은 분명 이 아파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특히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쿵, 쿵, 톡톡. 불규칙한 소리들이 마치 지수를 놀리는 것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지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 제가 살고 있는 호수에서 자꾸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요…”
관리사무소 직원은 무척 당황한 목소리였다. “네? 이상한 일이라뇨? 예를 들면요…?”
지수는 차마 칫솔이나 양말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신 “위층에서 밤낮으로 소음이 심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라고 얼버무렸다.
관리사무소는 친절하게도 위층에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사건은 최고조에 달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지수를 맞이한 것은 가히 ‘초토화’된 주방이었다.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릇들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싱크대 위에는 깨진 달걀 껍데기와 밀가루가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간장병이 보란 듯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악!!!!”

지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이건 명백한 공격이었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지수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 그때, 현관문이 똑똑, 하고 조심스럽게 노크되었다.

“저, 아래층이신가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지수는 숨을 들이켜고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에 깔끔한 차림, 살짝 처진 눈매는 다정해 보였지만, 무표정한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시크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너무 잘생겼다. 이 사람이 위층 남자라고?

“저, 위층 사는 현우라고 합니다.” 남자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관리사무소에서 소음 문제로 연락이 왔다고 해서요. 혹시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현우는 말을 잇다가 지수의 등 뒤로 보이는 난장판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깨진 그릇들, 하얀 밀가루, 노란 달걀 노른자…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주방 풍경에 현우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지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주방을 정리할 틈도 없이 문을 열어버린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런 추한 모습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보이다니!

“아… 저… 그게요…” 지수가 횡설수설했다. “이게 다… 위층에서 자꾸 시끄러워서… 죄송해요!”

현우는 가만히 지수를 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많이 시끄러웠나요?” 그의 눈동자가 주방을 훑었다. “혹시… 저 때문에 이렇게 되신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지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 따지고 보면 위층 소음 때문에 관리사무소에 전화했고, 그래서 이 남자가 찾아온 건 맞았다. 하지만 이 난장판은… 이건 현우 씨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폴터가이스트 때문이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이건… 여기 사는 어떤 장난꾸러기 때문에!” 지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장난꾸러기가 아니라… 귀신… 같은… 그게요…”

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신… 같은 거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지수를 지나쳐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수는 깜짝 놀랐다. “어딜 들어가세요!”

현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산산조각 난 접시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긴 손가락이 깨진 조각 위를 스쳤다.

“이건… 누군가 고의로 깬 것 같진 않은데요.” 그가 중얼거렸다. “깨진 방향이나 파편 상태가… 마치 위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밀가루랑 달걀은 왜 여기에…?”

그때, 현우의 손이 닿았던 싱크대 위의 간장병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움직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공중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현우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간장병 뚜껑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읍!”

지수는 입을 틀어막았다. 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장병이 그의 코앞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현우의 앞머리에 간장 몇 방울을 뿌렸다.

“아…” 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공포와 황당함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푸흐… 흐흐흐흐!”

현우는 앞머리에 묻은 간장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지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시크했지만,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방금… 저게 혼자 움직인 건가요?”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랬죠? 장난꾸러기… 아니, 귀신 같은 게 있다고.”

현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음… 재미있는 현상이네요.”

재미있다고?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지수는 현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잠시 정리하는 걸 도와드릴까요?” 현우가 앞머리의 간장을 한 번 더 닦아내며 말했다. “어차피 제가 소음 문제로 온 거니까요. 그리고… 이 ‘현상’도 궁금하고요.”

그렇게 현우와 지수의 기묘한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다. 현우는 지수가 난장판이 된 주방을 치우는 걸 도와주었고, 그 와중에도 간혹 ‘현상’이 발생했다. 컵이 저절로 굴러떨어지거나, 빗자루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지수 머리 위로 착지하거나. 그때마다 현우는 미소를 머금고 신기하다는 듯이 관찰했다. 지수는 그에게서 공포나 짜증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을 읽었다.

“이게… 마치 저희를 놀리는 것 같지 않아요?” 지수가 바닥의 유리 조각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현우가 삐딱하게 떨어진 액자 하나를 바로 걸어주며 답했다. “어쩌면… 관심 표현일지도 모르죠.”

그 후로 현우는 거의 매일 지수의 집에 들렀다. 관리사무소에서 공식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소음 문제’와 ‘기이한 현상’을 조사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며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폴터가이스트는 두 사람 사이를 좁히는 큐피드 역할을 자처하는 듯했다.

지수가 현우에게 커피를 타주려 하면, 설탕통이 저절로 쓰러져 현우의 바지에 설탕을 쏟았다. (지수가 황급히 닦아주느라 둘은 가까이 붙어야 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면, 스릴러 영화가 갑자기 로맨틱 코미디로 바뀌어 키스신이 재생되기도 했다. (둘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한번은 지수가 현우에게 팔을 뻗어 과자를 건네려는데, 팝콘 봉지가 갑자기 두 사람 사이로 공중 부양하더니 ‘펑!’ 하고 터져 둘의 얼굴에 팝콘 세례를 안기기도 했다. 둘은 팝콘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그 순간 지수는 현우에게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설렘을 느꼈다.

현우 또한 그런 지수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처음 만났을 때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한 현상들 속에서도 늘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현우는 점점 끌렸다.

어느 날 저녁,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폴터가이스트는 그날따라 조용했다. 현우가 들고 온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있던 지수가 문득 현우를 돌아봤다.
“근데 현우 씨는…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현우는 지수의 눈을 응시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지수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현우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지수 씨를 만나고 나서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지수의 볼을 감쌌다. 지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현우의 따뜻한 손길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지수 씨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요.”

그때였다. 거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갑자기 *덜컹덜컹*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구가 깜빡이더니, 급기야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전구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지수는 깜짝 놀라 현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현우는 피식 웃으며 지수를 더 단단히 안았다.

“우리 ‘친구’가 오늘따라 좀 격하네요.” 현우가 속삭였다.

“질투하나 봐요!” 지수가 현우의 품에서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현우는 지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숨결이 지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질투든, 응원이든… 우리를 방해하진 못할 거예요.”

그리고 현우는 천천히 지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지수의 눈동자가 현우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현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수에게로 다가갔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TV 리모컨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딸깍* 하고 소리를 냈다.

TV 화면이 *지이잉* 하고 켜지면서, 아주 선명하게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리모컨은 곧이어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에는 온갖 잡음을 뚫고 ‘삑-!’ 하는 방송 종료 신호음과 함께 ‘사랑과 행복을 찾으세요!’라는 문구가 깜빡였다.

지수와 현우는 서로를 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무섭지도 않았다. 이 장난꾸러기 존재는 그저 두 사람의 특별한 시작을 축하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현우는 지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과 행복, 찾은 것 같아요.”

지수는 현우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행복하게 웃었다.
“저도요. 엉망진창 폴터가이스트 덕분에.”

샹들리에는 여전히 덜컹거리고, 깨진 전구는 바닥에 박혀 빛을 잃었지만, 지수와 현우의 아파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환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특별한 손님과 함께하는, 두 사람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