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균열
고요했다. 언제나처럼, 이지연의 삶은 완벽히 정돈되어 있었다. 2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야경은 그녀의 고독을 찬양하는 듯 반짝였다. 서른두 살. 번화가 오피스텔의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그녀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고 일관된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 갓 입주한 이 ‘스마트 아파트’는 그런 그녀에게 최적의 공간이었다. 최소한, 그렇게 믿었다.
퇴근 후, 습관처럼 로봇 청소기를 돌리고 커피를 내렸다. 은은한 조명 아래, 어둠에 잠긴 도심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녀의 유일한 사치였다. 늘 그렇듯, 다 마신 머그컵은 싱크대 바로 옆 건조대에 올렸다. 물기가 마르도록 뒤집어 놓는 것까지 완벽한 습관이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컵을 들고 방으로 향하는 길에 미끄러뜨리거나 다른 곳에 둘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개운하지 못한 잠에서 깨어나 부엌으로 향했을 때, 컵은 거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물방울 자국까지 선명하게.
“내가… 어제 너무 피곤했나?”
이지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컵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 분명히 건조대에 두었건만. 피곤해서 착각했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가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질 때도 있었으니까. 이사를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니,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애써 생각의 꼬리를 잘라냈다.
며칠 뒤, 또다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거실 등이 저절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깜빡, 깜빡, 마치 누군가 전등 스위치를 빠르게 누르는 것처럼. 처음엔 단순한 오작동이라고 생각했다. 최첨단 시스템이라고 해도 결국 기계 아닌가.
‘스마트 홈 시스템도 완벽하진 않지.’
아직 보증 기간이니, 조만간 관리실에 문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거실의 불빛은, 꼭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유령의 손가락 같았다.
자신이 미쳐가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그녀의 집에 침입한 걸까?
이 아파트의 보안 시스템은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했다. 지문 인식과 비밀번호, 이중 잠금장치. 게다가 20층. 도어록은 항상 이중으로 걸려 있었고, 창문은 20층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침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심리가 불안정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최근 밤샘 작업이 잦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트레스 탓에 헛것이 보이고 들리는 걸지도.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침실에 누워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종이가 스치는 듯한, 혹은 아주 작은 발소리 같은.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지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창밖의 도시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들었는데.
‘환청인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 주변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지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아주 천천히, 조용히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굳었다.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그건 느껴진 것이 아니라, 명확히 눈으로 본 것이었다. 방은 어두웠지만,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문틈 사이로 침실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가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렸다. 절반쯤.
어둠 속에서 침실 안을 응시하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었다. 문 너머에는 그저 거실의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이 이지연의 등골을 차갑게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숨을 참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둠 속의 문은 미동도 없었다.
결국 이지연은 온몸의 기력을 끌어모아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높고 떨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지연은 더듬더듬 스탠드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환한 불빛이 침실을 채우자, 그제야 문 너머의 어둠이 물러났다.
아무도 없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지연은 거실로 나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심지어 아까 마셨던 커피잔도 싱크대 건조대에 완벽하게 뒤집혀 놓여 있었다.
‘꿈인가…?’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심장이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니,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똑똑히 봤다. 문이 열리는 것을.
그리고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을.
그날 밤, 이지연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새벽 내내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동이 터 올 무렵, 그녀는 멍한 눈으로 거실을 응시했다.
정적이 감돌았다. 이제는 그 정적이 주는 평화로움 대신, 섬뜩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미디어 스크린이 저절로 ‘딸깍’ 소리를 내며 켜졌다.
푸른 화면 위로, 흰 글자들이 느릿하게 떠올랐다.
\[ 너, 혼자가 아니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