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해가 지고 있었다. 잿빛으로 물든 도심의 스카이라인 위로 마지막 남은 주황색 빛 한 조각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지훈은 창가에 서서 멀리 펼쳐진 고요한 폐허를 응시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빌딩 숲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렸지만, 이제는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32층에 위치한 지훈의 아파트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감옥이었다.

찬 바람이 닫힌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낡은 방한포로 꼼꼼히 막아두었음에도 냉기는 쉬이 스며들었다. 지훈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돌렸다. 배급받은 통조림 수프 한 캔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나면, 밤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밤은 늘 길었다.

테이블 위에는 플라스틱 컵과 며칠 전 겨우 구해온 에너지 바 조각이 놓여 있었다. 지훈은 허리춤에 찬 칼집에서 녹슨 식칼을 꺼내 조심스럽게 에너지 바를 반으로 갈랐다. 나머지 반쪽은 내일 아침 식사였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의 유일한 규칙은 ‘낭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도, 식량도, 그리고… 희망도.

그때였다. 쿵.
아주 작고, 희미한 소리. 천장 쪽에서 들린 것 같기도 하고, 벽 너머에서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젠장….”
지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신경은 이미 한계였다. 밖은 여전히 위험했다. ‘그것들’은 밤이 되면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것들’과는 달랐다. 쿵, 하는 둔탁한 진동은 마치 위층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이 넘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칼을 쥔 채 몸을 굳혔다. 혹시 다른 생존자인가? 하지만 이 아파트 단지는 몇 달 전부터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었다. 아래층과 위층은 모두 잠겨 있거나, 아니면 진작에 다른 생존자들이 모두 떠나고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몇 번이고 모든 층을 수색하며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 없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지만,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건 오직 정적뿐이었다. 쿵, 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훈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천천히 식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린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이 부족했다. 항상 그랬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간밤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희미한 쿵 소리가 환청처럼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남은 에너지 바 조각을 우걱우걱 씹으며 식수통의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아껴 마셨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한 모금 더 들이켜고 싶었다.

물을 다 마신 플라스틱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손이 허공을 갈랐다.
컵이… 없었다.
“뭐야?”
그는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었고, 그 전에는 테이블 위에 두었었다.
“내가 어디 뒀지…?”
지훈은 테이블 아래를 훑고, 의자 밑을 살폈다. 그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규칙적이었다. 물건 하나하나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존에 있어서 사소한 실수조차 치명적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미쳐가는군.”
냉장고 문을 열고 식수통을 다시 채워 넣었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미끄러졌다.
냉장고 문짝에 붙어있는 자석들. 그중 하나가, 평소에는 가장 위쪽에 붙어있던 자석이 아래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장난을 친 것처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제 밤의 쿵 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자석을 다시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 식탁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 컵이 놓여 있었다.
“……!”
지훈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컵이, 마치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손을 떨며 컵을 움켜쥐었다. 컵의 표면은 미지근했다. 분명 차가운 물을 담았던 컵이었다.

“누구냐…?”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집 안에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아니,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지훈은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굳게 잠겨 있는 잠금쇠를 확인했다. 쇠사슬을 감고, 두꺼운 철판을 덧대어 용접까지 해둔 문이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더욱 어려웠다.

그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건가?
거실로 돌아왔다. 그의 시선은 불안하게 벽과 가구를 훑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마저도 어쩐지 음침하게 느껴졌다.

그날 오후 내내, 알 수 없는 현상들이 계속되었다.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짜식, 드디어 고장 났군.”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집어 들며 선반을 툭툭 쳤다. 선반은 멀쩡했다.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을 때였다. 서랍을 열자, 안에서 분명히 보관해 두었던 물품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내용물은 그대로였지만, 순서가 엉망이었다. 지훈은 매일 아침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서랍을 열었지만, 어제까지는 분명히 정리되어 있었다.

“농담하지 마라.”
그는 이를 악물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빚어낸 환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한 물리적 변화들이었다. 그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모든 방, 모든 벽장, 모든 창문까지.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밤이 찾아왔다. 밖은 다시 어둠에 잠겼고, 아파트 안은 알 수 없는 존재의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지훈은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손에는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식칼을 쥐고 있었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똑, 똑, 똑.

그때,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 바닥에는 며칠 전부터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던 유리컵이 깨져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식기들이었다.
숟가락과 포크, 나이프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쨍그랑, 달그락, 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들을 집어 던지는 것처럼.

“이게… 무슨…!”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광경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접시들이 싱크대 위에서 스스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강창!
싱크대 수전이 제멋대로 돌아가며 물을 뿜어냈다. 콸콸콸!
차가운 물줄기가 지훈의 얼굴에 튀었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가…! 나가란 말이야!”
그는 식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칼은 허공을 가를 뿐,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는 더욱 격렬하게 그를 조롱하는 듯했다.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거실의 소파가 혼자 힘으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했다. 끄으으윽!

지훈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를 가두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굳게 잠긴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찼다.
“열어! 열어! 젠장, 열어!”
쇠사슬과 용접된 철판은 굳건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아니, 밖으로 나간다 해도 더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의 등 뒤에서, 거실에 놓여 있던 대형 책장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쾅!
집 안 전체가 진동했다.
지훈은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살려줘… 제발….”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울음과 함께 갈라졌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귓가에, 아주 가깝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곳에 갇혔어.”

차가운 숨결이 그의 귓볼을 스쳤다.
지훈은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결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암흑 같은 거실 속에서, 무엇인가가 서서히 그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