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 아래, 무너진 도시의 실루엣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다. 찢어진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냈고, 그 사이를 비집고 자란 잡초들은 아스팔트를 뚫고 거대한 덩굴을 이루었다. 바람은 썩은 냄새와 흙먼지를 실어 날랐고,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신음 소리는 이 세계의 불변하는 배경음악이었다.
지훈은 낡은 방수포 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밤을 지샜다. 찬 기운이 온몸을 파고들었지만, 매일 밤 찾아오는 불면은 이제 익숙한 동반자였다. 새벽녘, 희미한 빛이 사방을 조금씩 밝혀 오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한번 쓸어주고, 찢어진 바지춤을 올려 맸다. 배낭은 어제 먹다 남은 말린 육포 한 조각과 흙탕물을 겨우 걸러낸 물통이 전부였다.
“또 하루 시작인가.”
갈라진 입술 새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허리에 찬 칼집에서 녹슨 마체테를 뽑아 들었다. 손잡이에 감긴 천은 이미 너덜너덜했지만, 녀석은 지난 2년간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가장 확실한 생존 도구였다.
그가 몸을 숨긴 곳은 한때 대형 마트였을 건물 잔해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갔고, 진열대는 녹슨 철골만 남은 채 뒤틀려 있었다. 발아래 밟히는 파편과 먼지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밤새 새로 나타난 것들은 없는지, 잠복하고 있는 위험은 없는지.
저 멀리,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금속 조각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너진 건물 틈새에 끼어 있는, 아마도 자동차의 일부인 듯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어둠 속에선 보이지 않던 그림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것들’. 지훈은 숨을 죽였다. 세 마리. 한때는 사람이었을, 이제는 오직 본능에만 움직이는 시체들. 썩어 문드러진 피부, 찢겨나간 옷가지,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느릿한 움직임.
그는 잠시 망설였다. 자동차 잔해 근처에 먹을 것이 있을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연료나 부품 같은, 다른 가치 있는 것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망설임은 잠시, 생존을 위한 본능이 지배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었다.
지훈은 천천히 움직였다. 붕괴된 통로를 따라, 낡은 선반들을 피해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갔다. 그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훈련된 사냥꾼처럼, 그는 주변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거슬릴 지경이었다.
가장 가까운 ‘그것’까지 약 20미터. 녀석은 웅크린 채 바닥의 무언가를 긁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뼈 부러지는 소리. 지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수도 없이 그 장면을 목격했지만, 볼 때마다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다른 두 마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잠들어 있는 건지, 아니면 먹잇감을 쫓아 한참을 헤매다 지친 건지.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마체테를 고쳐 잡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에 익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첫 번째 ‘그것’에게 달려드는 순간, 지훈의 움직임은 맹수 같았다. 그는 단숨에 거리를 좁혔고, 녀석이 고개를 들 새도 없이 마체테를 휘둘렀다. 정확하게 목덜미를 노린 일격. 썩은 살덩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힘없이 쓰러졌다. 축축한 핏물 대신 검붉은 액체가 바닥에 흥건했다.
“젠장.”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마리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훈은 망설일 틈 없이 몸을 돌려 자동차 잔해 쪽으로 뛰었다.
녀석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집요했다. 한 번 시야에 들어온 먹잇감은 놓치지 않았다. 지훈은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으며 속도를 냈다. 차가운 금속 조각들이 그의 피부를 스쳤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목표로 삼았던 차체는 은색 세단의 잔해였다. 뒷좌석 문이 찢겨나간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안으로 몸을 던졌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곰팡이가 피어 있는 시트가 그의 몸을 감쌌다.
밖에서는 녀석들의 쿵, 쿵 하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드러난 두 개의 그림자가 차체 주변을 맴돌았다. 지훈은 숨을 죽인 채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들’ 중 한 마리가 찢겨나간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텅 빈 눈동자가 지훈을 향해 번뜩이는 듯했다. 썩어가는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훈은 마체테를 꽉 쥐었다. 한 마리 더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잡힐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콰앙!*
머리 위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건물 잔해 위쪽에 걸쳐 있던 철골 구조물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던 ‘그것’ 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훈의 머릿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절호의 기회, 동시에 가장 큰 위협.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차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뒤따르던 ‘그것’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철골 구조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철골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엄청난 먼지가 피어올랐고, 지훈은 콜록거리며 몸을 숙였다. 그 진동에 가까이 있던 나머지 한 마리 ‘그것’마저 휘청거렸다.
지훈은 먼지 속을 뚫고 달렸다. 뒤에서 무언가 따라오고 있다는 감각은 그를 미친 듯이 질주하게 만들었다. 그는 낡은 버스 정류장 간판을 넘어섰고, 잔해 더미를 뛰어넘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폐가 아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멀리, 마트 건물 뒤편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그곳은 항상 어둡고 위험했지만, 지금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골목 안으로 몸을 던졌다.
골목 안은 온갖 쓰레기와 폐기물로 가득했다. 곰팡이 냄새와 썩은 음식물 냄새가 뒤섞여 역한 악취를 풍겼다. 지훈은 낡은 드럼통 뒤에 몸을 숨겼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멎었다. 녀석은 골목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놓쳐버린 것일까.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체테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땀과 먼지로 범벅된 얼굴 위로 절박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겨우 살아남았다. 또 다시.
지훈은 배낭을 열어 물통을 꺼냈다. 목이 타는 듯 갈증이 느껴졌다. 흙탕물을 걸러낸 물은 묘하게 비릿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생명수였다. 그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골목은 건물의 뒷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래전에 버려진 상점들의 뒷문. 잠겨 있는 문 너머에서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뭐가 있을까?’
어쩌면 안전한 은신처일 수도, 혹은 더 큰 위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 골목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녀석이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혹은 또 다른 ‘그것들’이.
지훈은 다시 마체테를 고쳐 잡았다. 문을 열어볼까, 아니면 이대로 골목을 계속 헤쳐 나갈까. 선택의 기로에 섰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굳어 있었다.
생존은 멈추지 않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는 늘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낡은 철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짙은 어둠과 함께 썩은 먼지 냄새가 확 풍겨왔다. 빛 한 줄기 없는 내부.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발아래에서 작은 파편 하나가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하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하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또 시작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잠시도 평화로울 틈이 없었다. 그는 마체테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익숙한 싸움이 또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