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모래바람이 폐허가 된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은 살갗을 베는 듯했고, 퀴퀴한 쇠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강현우는 낡은 방수포 아래, 부서진 철골 구조물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는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전투복은 찢어지고 해져 너덜거렸으며,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피와 흙은 그의 처참한 몰골을 더욱 강조했다.
“젠장…”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목구멍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고, 입술은 터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녹슨 금속 조각을 그는 멍하니 바라봤다. 한때 찬란했던 문양의 일부. 그의 거신, ‘천둥’의 엠블럼 조각이었다.
천둥. 그 이름만으로도 적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리고 동맹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던 강철의 거신. 최신예 전투형 기갑병기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 폐허 속에 묻혀버린 고철 덩어리.
현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각 없는 다리보다, 지독한 허기보다, 그를 갉아먹는 건 뼛속 깊이 박힌 배신의 상처였다.
* * *
“현우야, 우리 둘이 뭉치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고!”
이준혁. 그의 이름이 떠오르자,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폐허를 집어삼키는 모래폭풍 속에서, 과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수년 전, 아직 희망이 살아있던 시절. 훈련장에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웃고 떠들던 준혁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준혁은 현우의 유일한 친구이자, 누구보다 믿었던 전우였다. 서로의 등을 맡기고,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수없이 많은 위기를 헤쳐 나왔다. 현우가 천둥의 파일럿이었다면, 준혁은 그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또 다른 거신, ‘섬광’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섬광은 천둥의 기동성을 보조하고 후방을 견제하는 역할로, 두 거신은 함께 전장을 지배했다.
“그래. 너와 나, 이 둘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현우는 그렇게 믿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천둥의 설계 도면과 핵심 기술까지 그와 공유했다. 함께 더 강력한 병기를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이 구축한 연합은 승승장구했고, 마지막 결전만이 남아있었다.
* * *
그날은 유난히 붉은 노을이 하늘을 태우던 날이었다. 최종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총공세가 펼쳐졌고, 현우는 천둥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준혁의 섬광은 그의 왼쪽 측면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돌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준혁! 5초 뒤, 좌측 방어선 붕괴! 돌격 개시한다!”
현우의 외침에 준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알겠다, 현우! 언제나처럼, 네 뒤는 내가 완벽하게 막아주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적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현우는 천둥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진 강력한 충격. 시스템 경고음이 비명을 질렀고, 천둥의 핵심 동력부가 일순간 마비되었다. 현우는 조종간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뭐… 뭐야?! 적의 기습인가? 준혁! 보고해!”
하지만 준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기체 내부 통신망에 울려 퍼진 것은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기습? 아니. 네가 믿었던 자의 ‘결정’이지.”
그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믿을 수 없었다. 현우는 시스템 모니터를 황급히 확인했다. 충격의 진원지는… 섬광. 준혁의 거신이었다.
“이… 준혁…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현우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천둥은 이미 적진 한가운데서 무력화되어 있었다. 적의 포화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시스템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현우는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냈다. 조종석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슨 짓이냐고? 글쎄. 네가 너무 앞서나가서 말이야. 네게는 더 이상 이 천둥이 필요 없어. 아니, 애초에 이 거신은… 내 것이었어야 했어.”
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광기와 탐욕은 현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비웃듯 덧붙였다.
“이제 천둥은 내 손에 들어올 거야. 그리고, 너는… 추락하는 영웅으로 기억되겠지. 미안하다, 친구. 세상은… 원래 강한 자의 것이거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섬광은 천둥의 파손된 동력부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현우의 시야는 암흑으로 변했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당한 비열하고 잔인한 배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참혹한 행위였다.
* * *
다시 현실.
현우는 겨우 눈을 떴다. 붉은 노을 대신, 폐허의 회색빛 하늘만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부서진 천둥의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이끌고 탈출했지만, 한쪽 다리를 잃었고,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수많은 밤을 죽은 듯이 잠들고, 겨우 깨어나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이… 준혁…”
이름을 읊조리자,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을 버린 준혁에게, 자신을 배신한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죽어가는 영웅으로 기억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강현우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천둥의 엠블럼 조각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붙이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통증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맑게 했다.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그에게는 복수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의 눈빛이 살아 움직였다. 오랜 시간 절망과 체념에 갇혀 있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부활한 망령이었다.
현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부서진 다리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철골을 짚고 일어섰다. 저 멀리, 모래바람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오래된 격납고의 잔해였다. 그곳에…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폐허 속으로 향했다. 발자국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준혁.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지옥에서 되찾아 주마.”
차갑고도 섬뜩한 맹세가 모래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