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서막
**[장면 1]**
**[어둠이 짙게 깔린, 비좁은 뒷골목. 썩은 음식물 냄새와 빗물 섞인 흙냄새가 진동한다.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창문에는 넝마 조각이 너덜거린다. 저 멀리, 황제국의 웅장한 감시탑이 붉은 불빛을 번뜩이며 이 모든 초라함을 내려다보고 있다. 골목 어귀, 초췌한 노파가 쭈그려 앉아 바싹 마른 손으로 뭔가를 구걸하고 있다. 그 옆을 지나치는 황제군 병사들의 무겁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불길하게 울린다. 그들은 번쩍이는 검은 갑옷을 입고, 얼굴에는 감정 없는 가면을 쓰고 있다.]**
**[감시탑의 붉은 불빛이 순간적으로 골목 전체를 비춘다. 그 빛 아래, 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이안이다. 그는 허름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노파와 병사들을 번갈아 훑는다. 분노, 슬픔, 그리고 무언가 단단한 결의가 그 눈 속에 뒤섞여 있다.]**
**이안**
(낮게 읊조리듯)
…또 오늘인가.
**[장면 2]**
**[이안은 골목을 빠져나와 왁자지껄하지만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시장통으로 들어선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고, 상인들은 겨우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고 있다. 썩어가는 과일, 벌레 먹은 채소, 정체 모를 고기 덩어리들이 진열되어 있다. 시장 중앙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그 스크린에서는 번영하는 황제국의 수도 ‘엘리시아’의 모습과 황제의 위엄을 찬양하는 선전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스크린 아래, 감찰관 몇몇이 날카로운 눈으로 군중을 훑고 있다.]**
**[이안은 능숙하게 군중 속으로 녹아든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만, 눈은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미끄러져 나간다. 그의 손에는 낡은 자루가 들려 있다.]**
**이안**
(독백)
…이젠 숨조차 맘대로 쉴 수 없게 만드는구나.
**[장면 3]**
**[시장 한구석, 허름한 약초상이 있다. 겉보기엔 평범한 상점이지만, 안쪽은 어둡고 깊어 보인다. 문에 걸린 방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이안의 방문을 알린다. 가게 안은 온갖 약초 냄새와 흙냄새로 가득하다. 선반에는 말린 약초들이 가득하고,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병들이 반짝인다.]**
**[가게 안쪽에서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라다. 그녀는 약초들을 분류하고 있다. 마른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인다. 그녀의 얼굴은 지쳐 보이지만,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세라**
어쩌다 오셨나, 이안 씨. 이 시간에 여기까지 발걸음 할 일은 없었을 텐데.
**이안**
(문 뒤를 살피며)
급한 소식이 있어서요.
**[세라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이 이안의 눈과 마주친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굳건한 신뢰와 함께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세라**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들어오세요. 감찰관들의 눈이 거리에 가득합니다.
**[장면 4]**
**[약초상 뒤편의 비밀스러운 지하 창고. 좁고 어둡지만, 한쪽 벽에는 오래된 등잔이 희미하게 빛을 밝히고 있다. 나무 선반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뒤편에는 수많은 지도 조각, 암호문, 그리고 칼과 단도들이 숨겨져 있다.]**
**[이안과 세라가 마주 보고 앉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이안**
(자루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꺼내며)
오늘 아침, 새로운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제국이 ‘황무지 개척’을 명목으로 징집 인원을 두 배로 늘린답니다. 식량 배급은 절반으로 줄고요.
**세라**
(눈을 감고 한숨을 쉰다)
…결국 올 것이 왔군.
**이안**
외곽지대 사람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어제만 해도 굶주림에 쓰러진 아이가 셋… 황제군은 그걸 보고도 그저 비웃을 뿐이었습니다.
**세라**
(이를 악물며)
그들의 목적은 명확해. 우리를 쥐어짜서 피 한 방울까지 빼먹으려는 거지. 그러고도 감히 ‘번영’과 ‘평화’를 논해? 역겨워.
**이안**
(주먹을 꽉 쥔다)
저항해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 바로 그때입니다.
**세라**
(등잔 불빛을 응시하며)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지난 밤, 새로운 감찰관이 이 구역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름은 ‘칼릭스’. 그는 잔혹하고 빈틈없는 사냥개로 유명해. 꼬리 하나라도 잡히면… 모든 게 끝이야.
**[이안의 얼굴에 순간적인 불안감이 스친다. 칼릭스라는 이름은 그에게도 익숙한 공포의 상징이다.]**
**이안**
(목소리가 떨린다)
칼릭스… 그 자가 여기까지 올 줄은…
**세라**
(이안의 손을 잡으며)
두려워 마.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용기 덕분이야. 칼릭스 같은 자들이 우리의 불씨를 꺼트리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더 신중해야 해. 계획은 예정대로 ‘달이 없는 밤’으로 유지한다.
**이안**
(심호흡을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쪽 준비는…
**세라**
마을 곳곳에 소식이 전해졌다. 불만을 품은 이들이 수없이 많아. 각 구역의 지휘자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을 거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눈은 다시금 단단한 결의로 가득 찬다. 그는 마치 거대한 어둠 속에서 겨우 한 점의 불꽃을 지켜내려는 듯한 표정이다.]**
**이안**
(낮은 목소리로)
저항의 불꽃이… 타오를 겁니다.
**[장면 5]**
**[이안은 지하 창고를 빠져나와 다시 어두운 밤거리로 나선다. 시장통은 이미 파장 분위기이고, 감찰관들의 순찰도 더욱 삼엄해졌다. 그는 낡은 건물들의 그림자 속을 조용히 이동한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그의 망토를 흔든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장통 한가운데에 세워진 황제국의 거대한 문양이다. 황금빛 독수리가 발톱으로 세계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 그 문양은 밤에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감이 서려 있다.]**
**이안**
(독백)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의 절규가, 저 높고 오만한 성벽을 부술 것이다.
**[장면 6]**
**[이안은 낡은 다리 위에 선다. 다리 아래로는 더러운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희미한 불빛조차 없는, 더욱 비참한 외곽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다. 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고, 그 액체 위로 작은 씨앗 하나가 떠 있다.]**
**[이안은 병을 들어 올려 어둠 속을 응시한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과 함께 섬뜩할 정도의 결의가 교차한다. 그는 천천히 병 마개를 열고, 강물 위로 씨앗을 띄워 보낸다. 씨앗은 흐르는 물살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안**
(낮게 읊조린다)
자라나라… 핏빛 혁명의 씨앗이여…
**[그 순간, 이안의 등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 조용하고 신중한 발소리.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차가운 밤바람만이 그의 뺨을 스칠 뿐이다.]**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 씨앗은, 마치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처럼, 밤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칼릭스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을 덮치고 있음을 직감한다. 이제 남은 시간은 없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황제국의 감시탑이 붉은 불빛을 번뜩이며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불빛은 마치 감시자의 눈동자처럼, 혹은 피로 물든 미래의 전조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다.]**
**(에피소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