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잔해 속에서
무너진 도시의 뼈대가 하늘을 찔렀다. 콘크리트와 철근은 수십 년의 풍파에 깎여 날카로운 이빨처럼 보였다. 지훈은 익숙하게 그 이빨들 사이를 헤집었다. 발밑에서는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밟힐 때마다 서걱거리는 노래를 불렀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지 얼마나 됐을까. 스무 해? 서른 해? 기억하는 건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폐허와, 그 폐허 속을 떠도는 그림자들뿐이었다.
오늘의 수확은 형편없었다.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에 널린 건 녹슨 고철과, 오염된 물이 고인 웅덩이, 그리고 이름 모를 식물들이 뒤엉킨 잔해뿐이었다. 식물들은 예전의 그것들과는 달랐다. 잎은 짙은 보랏빛이었고, 줄기는 기이하게 뒤틀려 마치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독성이 강해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을 지훈은 오래전에 뼈저리게 배웠다.
낡은 방독면 안으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탁한 공기 속에는 금속과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썩은 내가 뒤섞여 있었다. 지훈은 허리춤에 찬 낡은 손도끼를 고쳐 잡았다. 유일한 동반자이자, 유일한 생존 도구였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군.”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빚어내는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그는 한때 번화가였을 법한 건물들의 틈새를 살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간판의 글자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희망 슈퍼’, ‘미래 전자’. 모두 과거의 유령이었다.
지훈은 허물어진 건물의 지하층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다. 빗물에 쓸려 내려온 흙과 돌멩이로 절반쯤 막혀 있었지만, 그 너머로 어둠이 손짓했다. 오래된 건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가끔은 그런 곳에 뜻밖의 행운이 숨어있기도 했다. 깨끗한 물 한 병,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 혹은 운 좋게 작동하는 손전등 같은 것들 말이다.
조심스럽게 흙더미를 헤치고 지하로 내려섰다.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습하고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전등을 켜자 희미한 불빛이 좁은 통로를 밝혔다. 벽에는 오래된 낙서들이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흐릿한 글씨체로 쓰인 “살려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지훈은 아무 감정 없이 그 글자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흔한 절규였다.
통로 끝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녹슨 경첩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문을 열자, 넓지 않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에는 곰팡이가 검은 얼룩을 만들었고, 바닥에는 부서진 가구들의 파편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지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먼지에 뒤덮여 있었지만, 분명히 메탈릭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얇고 견고한 금속제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과 함께 작은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다.
이런 물건은 흔치 않았다. 과거의 유물이거나, 혹은 누군가 소중히 숨겨두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훈은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전자식 잠금장치였다. 망가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리춤의 만능 도구를 꺼냈다. 얇은 철사를 구부려 잠금장치의 틈새로 집어넣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렸다.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휴대용 발전기, 아직 용액이 마르지 않은 정수 필터,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육포 몇 조각이 들어있었다. 육포는 비닐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예상보다 상태가 좋았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을 버틸 수 있는 귀한 식량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지하 전체를 울리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지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망할. 이 건물은 곧 무너질 참인데, 대체…
쿵! 쿵! 쿵!
진동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어진 소리는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벽을 긁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 그리고 짐승의 헐떡거림이었다. 지훈은 즉시 손전등을 끄고 몸을 웅크렸다. 상자를 품에 안고 벽에 바짝 붙었다.
그림자.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형체가 통로 끝에서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지만, 거친 숨소리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선명했다. ‘변이체’였다. 이 끔찍한 세상이 빚어낸 괴물들. 그것들은 지상보다 지하를 선호했고, 빛에 민감했다.
녀석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지훈은 놈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도마뱀과 인간을 어설프게 섞어 놓은 듯한 형태였다. 딱딱한 비늘로 뒤덮인 피부, 길고 날카로운 손톱,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붉은 눈. 놈은 냄새를 맡는 듯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여기까지…” 지훈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 건물은 워낙 낡아서 변이체가 들어올 만한 구멍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지진으로 생긴 균열을 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변이체는 지훈이 숨어있는 방 입구에 멈춰 섰다. 녀석의 콧구멍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 틀림없었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짐승의 냄새가 방독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쉬익-!
괴물의 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지훈은 손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귀청이 터질 듯 뛰었지만,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이렇게 숨죽이며 버텨왔으니까.
변이체가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놈의 눈은 아직 지훈을 정확히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어둠이 지훈의 유일한 방패였다.
쿵! 쿵!
놈이 방 한가운데로 들어섰을 때, 지훈은 움직였다. 숨어있던 벽 뒤편에서 튀어나와 녀석의 약점인 목덜미를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빠르고, 정확하고, 무자비하게.
칼날이 단단한 비늘을 뚫고 뼈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크아아악!
변이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길고 날카로운 꼬리가 허공을 갈랐고, 지훈은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놈의 발톱이 휘두르는 바람에 벽에서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지훈은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렀다. 놈의 몸통, 그리고 앞발에 연이어 찍었다. 비늘이 부서지고 검붉은 피가 튀었다.
놈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주변의 부서진 가구들이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놈의 맹렬한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놈의 공격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명확한 조준이 어려웠다. 지훈은 놈의 움직임을 감으로 예측하며 피하고, 기회가 오면 정확히 노렸다.
변이체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놈은 지훈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엄청났다. 지훈은 순간적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 놈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고, 낡은 건물 전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변이체가 벽에 부딪혀 잠시 휘청거리는 틈을 타, 지훈은 놈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온 힘을 실어 손도끼를 놈의 머리통에 내리찍었다.
푸욱!
이번에는 뼈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변이체의 몸이 크게 경련하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축축한 바닥에 검붉은 피가 고였다. 놈의 몸은 잠시 동안 경련하다가, 완전히 멈췄다.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변이체를 바라봤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손도끼를 쥐고 있던 손이 떨렸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서 숨을 골랐다. 녀석의 죽은 눈은 여전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상자는 다행히 품속에서 무사했다. 지훈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손이 후들거렸다. 방독면을 벗자, 썩은 냄새가 더욱 강하게 코를 찔렀지만,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넣었다. 질기고 짠맛이 혀를 감쌌다. 꿀맛이었다. 이 한 조각의 육포가 지금 이 순간의 생존을 증명하는 듯했다.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위험해졌다. 무너질 것 같은 건물, 그리고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변이체들이 몰려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육포의 맛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 모든 두려움을 잠시 잊게 했다.
창밖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부서진 도시의 실루엣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쯤 이 끔찍한 생존이 끝날까. 그 질문은 답 없이 그의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는 다시 도끼를 챙기고, 잿빛 잔해 속으로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했다. 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올 테니까. 이 잔혹한 세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