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고요한 침묵 속의 균열
은서는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비릿한 수돗물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사를 온 지 두 달, 아직도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고층 아파트의 텅 빈 거실은 한없이 넓게 느껴졌고, 밤이 되면 창밖의 도시 불빛이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삭막한 고요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에 중독된 지 오래였다.
늦은 밤, 퇴근한 은서는 습관처럼 현관문을 잠그고 체인을 걸었다. 현관은 여전히 굳건했고, 신발장도 가지런했다. 어젯밤 분명히 닫아놓았던 안방 문이 조금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은서는 피곤에 지친 탓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내가 제대로 안 닫았겠지.’ 그녀는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완벽주의는 아니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문단속을 하는 것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안방 문을 닫았다. 묵직한 나무 문이 ‘딸깍’ 하고 확실히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은서는 어쩐지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얇은 이불을 걷고 일어섰을 때, 또다시 안방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분명 잠갔는데.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어젯밤 잠결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한 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환기가 됐다고 생각하자.”
혼잣말을 하며 문을 닫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잠기는 소리가 났다.
사흘 뒤, 은서는 평소처럼 서재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렸다. 처음에는 위층이나 옆집에서 나는 소리겠거니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이어서 ‘스르륵’ 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마치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였다. 은서는 불안한 마음에 작업하던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어두웠고, 거실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실에 불을 켜놓았던가? 분명 집에 들어오자마자 불을 끄고 서재로 직행했었는데. 심장이 조금씩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거실에 도착했을 때, 은서는 숨을 헙 들이켰다. 거실 중앙에 놓여있던 커피 테이블 위의 유리 화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어제 꽃집에서 새로 사 온 백합 몇 송이가 물과 함께 카페트 위에 흩어져 있었다. 꽃잎은 차갑게 젖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은서는 멍하니 깨진 화병 조각과 젖은 꽃잎을 내려다봤다. 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분명히 화병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었고,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상태였다. 바람이 들어올 틈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공기가 무겁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방금 이 공간에 머물다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친구? 가족? 아니, 이 황당한 상황을 설명하면 분명 모두 자신을 피곤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웠다. 백합 꽃잎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젖은 카펫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그 과정 내내 그녀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거실 구석진 곳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벽지 무늬가 마치 형상처럼 느껴지는 착각. 그녀는 서둘러 모든 작업을 마치고 서재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노트북 화면을 켰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은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까 문을 닫았을 때처럼,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밖에서는 도시의 불빛이 여전히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평화를 느끼지 못했다.
‘설마… 누가 들어왔던 걸까?’
그럴 리 없었다. 이 아파트는 보안이 철저했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문단속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락은 완벽했고, 체인까지 걸어 두었으니 물리적으로 침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뒤척이다, 문득 그녀의 귀에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딸깍.’
아주 작은 소리였다. 마치 안방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
은서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귀청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설마.’
환청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너무 예민해져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은 채,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더듬거렸다.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때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발목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서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어둠 속,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방문 너머의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실의 불빛이 마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누군가 서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였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주저앉아, 그녀는 그저 그 그림자를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소리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유일한 소음이었다.
그때, 그림자가 아주 천천히,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동시에, 거실에서 작은 ‘딸깍’ 소리가 들려왔다.
전등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아파트는 완벽한 암흑 속에 잠겼다. 창밖의 도시 불빛조차, 이제는 그녀를 지켜주는 눈동자가 아닌, 어둠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를 드러내는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은서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녀의 목을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손이 조여 오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파트의 고요한 침묵이,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