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녹슨 칼날의 맹세
삭막한 바람이 불었다. 흙먼지 섞인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고대 도시의 폐허 위에 세워진 제국군의 감시탑, 그 망루 위에 걸린 제국군의 깃발이 검은 장막처럼 휘날렸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짙은 절망의 그림자였다. 진호는 낡은 가죽 갑옷 위에 두른 두꺼운 천을 단단히 여몄다. 손에 쥐인 녹슨 단검은 그의 심장박동과 함께 미미하게 떨렸다. 현실의 배고픔이 가상현실 속에서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곳에서만큼은 달랐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우리는 스스로 싸울 수 있었다.
“진호님, 순찰병이 사라졌어요. 예상보다 일찍입니다.”
아라의 조용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앳된 얼굴이지만 눈빛은 밤의 올빼미처럼 날카로웠다. 등에는 짧은 활과 화살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희망과도 같았다.
“함정인가?”
노인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흙빛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수많은 전투와 고난의 흔적이었다. 그의 손에는 제국군 병사의 것을 뺏은 듯한, 묵직한 철퇴가 들려 있었다. 그가 지닌 경력만큼이나 묵직한 삶의 무게가 실린 무기였다.
“아닙니다. 감시를 강화한 겁니다. 우리가 계속 주변을 맴돌았으니… 슬슬 낌새를 챘겠죠.”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후방의 숲을 가리켰다.
“아라, 후방을 맡아줘. 노인장님은 저와 함께 중앙 돌파입니다. 신호는 제가 보냅니다.”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폐허가 된 마을의 낡은 벽돌담을 따라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지나자, 거대한 곡물창고의 그림자가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썩은 곡식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공기가 코를 찔렀다. 제국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수확한 곡식을 이곳에 쌓아두고 썩히고 있었다. 당장 내일 먹을 양식도 없는 이들이 수두룩한데도 말이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정적을 깨고, 등 뒤에서 철커덕거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 누구냐!”
갑자기 켜진 횃불이 어둠을 가르고, 제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병사들의 갑옷은 밤하늘 아래서도 번들거렸고, 헬멧 아래의 눈은 살기등등했다. 잘 훈련된 그들의 움직임은 평범한 도적떼와는 차원이 달랐다.
“젠장, 들켰군!”
노인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지체 없이 철퇴를 휘둘러 가장 가까이 다가온 병사의 머리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경험치 메시지가 희미하게 번득였지만, 진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돌격!”
진호는 외치며 단검을 뽑았다. 녹슨 칼날이 횃불 빛에 번뜩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사들의 대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훈련받은 병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절박한 민초의 분노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잘 벼려져 있었지만, 진호의 단검에는 삶을 향한 처절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단검은 제국군 병사들의 엉성한 갑옷 틈새를 찾아 정확히 파고들었다. 진호는 옆구리를 스치는 창날을 간신히 피하며, 적의 목덜미를 베었다.
“크아악!”
병사의 비명이 짧게 터져 나왔다. 곧이어 뒤에서 덮쳐오는 또 다른 병사의 팔을 쳐내고, 진호는 바닥에 구르며 그의 다리를 베었다. 민첩함이 곧 생존이었다. 그에게는 장대한 기술이나 화려한 마법이 없었다. 오직 본능과 경험, 그리고 분노만이 무기였다.
그 순간, 숲 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라의 신호였다. 뒤이어 화살들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병사들의 다리나 어깨에 박혔다. 병사들이 잠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노인장은 거구의 병사 하나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는 곡물창고 문으로 향했다.
“진호! 폭탄을 설치해!”
진호는 이미 가방에서 간이 폭탄을 꺼내 들었다. 이 게임 속에서 ‘폭탄’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법 재료를 조합하여 만든 불안정한 연소 장치였다. 작고 볼품없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빠르게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모두 물러나!”
진호의 외침과 동시에 아라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창고의 마른 지붕에 정확히 박혔다. 낡은 목재와 먼지가 뒤섞인 곳에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제국 병사들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부는 불을 끄려 허둥댔고, 일부는 여전히 진호와 노인장을 막으려 했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폭발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곡물창고의 낡은 목재 가루와 썩은 곡식들이 불길과 함께 솟구쳐 올랐다. 진동이 땅을 울렸다. 마치 썩어가는 제국의 심장이 터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화염은 순식간에 거대한 곡물창고를 집어삼키며 붉은 혀를 낼름거렸다.
“성공이다…!”
노인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웠다.
진호는 불타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백성들의 피땀이 섞인 곡식이 썩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는 것이다. 허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한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그 재 위에서 새로운 세상이 피어날 겁니다.”
아라가 달려와 진호의 옆에 섰다. 그녀의 눈에도 결의가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네, 진호님.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세 사람은 불타는 곡물창고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놓여 있었다. 썩어가는 제국의 심장에 박힐, 또 다른 칼날을 향한 걸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녹슨 단검이 다시 번뜩이는 듯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오늘 밤, 그들은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먼 훗날 거대한 불길이 될 작은 불씨가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