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돈의 잔상] 32화: 텅 빈 공간의 침묵
밤이 깊었다. 지훈은 소파에 반쯤 파묻힌 채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봤다. 몇 시간째 재생 중인 영상 속에서는, 어젯밤 분명 아무도 만지지 않았던 거실 한가운데의 테이블이 서서히, 아주 미세하게 왼쪽으로 밀려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쪼개 봐도 인간의 힘으로 밀린 흔적은 없었다. 그저, 스르륵.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밑을 스치기라도 한 듯, 그렇게.
“미친… 정말인가.”
혼잣말이 목구멍에서 바싹 마른 모래처럼 흘러나왔다. 어젯밤, 아니 어제 새벽에 찍은 영상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 한쪽에 설치해 둔 간이 카메라가 건져 올린 기괴한 증거. 처음엔 착각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돌려봐도 테이블은 움직였다. 좁은 거실의 정적 속에서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처럼 명확하고 끔찍했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으나, 꿈조차 불안했다. 천장 높은 곳에서 끈적한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아침이 오자마자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아파트의 넓은 창문 밖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고층 빌딩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넘나들며 우뚝 서 있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지훈에게 이 아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조차 그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욕실 문 너머, 아니 어쩌면 샤워 커튼 뒤에 누군가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예민해진 신경은 벽면의 타일 무늬 하나하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소리 하나하나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점심은 거르고 그대로 출근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 기괴한 존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엑셀 시트를 들여다보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비어있는 아파트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 없는 틈을 타 집안의 물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서랍이 열리고 닫히고, 액자가 기울어지고, 컵이 깨져 나뒹굴고.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퇴근 시간, 그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홀로 남은 사무실의 고요함은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이곳은 적어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돌아가야만 했다.
아파트 복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싸늘한 한기가 그를 감쌌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그는 망설이다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저 과도한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집 안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어젯밤 그를 공포에 떨게 했던 테이블은 제자리에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도, 엉망이 된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는 듯했으나, 이상한 이물감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다 멈칫했다.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 그 안에 꽂혀있던 식칼 한 자루가, 평소와 달리 정확히 180도 돌아가 있었다. 칼날이 벽 쪽을 향해 있어야 할 칼은, 날카로운 날을 드러낸 채 지훈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해뒀나?”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늘 칼날이 안쪽을 향하도록 놓는 습관이 있었다. 안전 때문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집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은근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얼른 칼을 바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부엌에서 벗어나 거실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칼날의 서늘한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젠장.”
혼잣말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이러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하지만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려 하자 손이 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에 유령이 있는 것 같아? 미쳤냐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때였다.
“…응?”
지훈의 시선이 거실 창문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블라인드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것도 딱 그의 눈높이에 맞춰, 한 사람의 눈이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블라인드는 분명 아침에 그가 올리고 나갔다. 해가 잘 들도록. 그런데 지금은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가, 마치 누군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살금살금 다가서는 발걸음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창문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덜컥, 하고 블라인드의 한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려던 순간.
갑자기,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파르르, 파르르. 마치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훈은 깜짝 놀라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은 창문에서 조명으로 옮겨갔다.
“이게… 또 왜 이래?”
짜증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러자 전구의 깜빡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처럼, 그 빛은 섬광처럼 번득이더니 이내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암전.
순식간에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겼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벽에 있는 메인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찰칵, 찰칵.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흐읍.”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들었다.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잘못 들었을 리 없다. 텅 빈 거실의 어둠 속에서, 아주 가늘고 슬픈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마치 벽 속에서 스며 나오는 것처럼.
소리는 분명 침실 쪽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망설였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확인해야 하나? 도저히 이 아파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고 천천히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플래시 불빛이 어둠을 찢으며 침실 문을 비췄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아니, 열려 있었다기보다는… *벌어져 있었다*. 틈새가 너무도 완벽하게, 마치 누군가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을 안으로 밀었다. 끼이익- 낡은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는 가지런했고, 서랍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도 멎어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플래시 불빛을 사방으로 비췄다. 옷장 안, 침대 밑, 커튼 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그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또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거나.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스윽-**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플래시 불빛이 옷장으로 향했다.
새까만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옷장 문틈으로, 아주 희미하게.
**붉은색.**
무언가 붉은 것이 비쳤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거대한 북이 울리는 것처럼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그리고 그 붉은 것이 천천히, 옷장 밖으로, 마치 기어 나오는 것처럼.
**툭.**
떨어졌다.
지훈의 시선이 그 붉은 것에 꽂혔다.
그것은… 그의 침실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이 아끼던 가족사진 속의, 오래된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오래된 장난감 곰 인형**이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떨렸다. 저 인형은 분명 벽에 걸린 액자 선반 위에 놓여 있었을 터였다. 옷장 안이 아니라.
그리고 그 인형의 한쪽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깜빡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옷장 안의 어둠 속에서.
**”…지훈아.”**
아주 낮고 끈적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한, 섬뜩한 속삭임이.
그리고 옷장 안에서, 무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희미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