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피날레와 프롤로그**
김민준은 늘 바랐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숨 막히는 빌딩 숲, 매일 똑같이 삐걱거리는 키보드 소리, 그리고 영혼 없이 오가는 상사의 잔소리. 서른 해 남짓 살아온 인생이 이리도 밋밋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의 삶은 아무런 특별함도, 기적도 없었다. 그저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만이 유일한 성취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야근을 마치고 터덜터덜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 횡단보도의 초록불은 그의 지친 발걸음만큼이나 느리게 깜빡였다. ‘오늘은 또 라면인가… 아니면 어제 남은 치킨 조각이라도?’ 무미건조한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던 찰나였다.
“크아아아악!”
귓전을 때리는 섬뜩한 비명 소리, 그리고 거대한 굉음. 민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여 미터 떨어진 도로 위에서, 거대한 트럭 한 대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휘청이고 있었다. 그 트럭은 중심을 잃고 횡단보도를 향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퇴근길,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피해요!”
누군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트럭은 끔찍한 속도로 인파를 덮치고 있었다. 그 순간,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작은 아이였다. 아이는 트럭의 궤적 바로 한가운데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켜!”
민준은 있는 힘껏 달려 아이를 밀쳐냈다. 아이는 몇 발자국 굴러 떨어진 곳에서 멀뚱멀뚱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세상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암전되었다. 고통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그저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격렬한 진동만이 마지막 감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래, 김민준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마지막 순간조차 특별할 것 없던,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희생이었다.
* * *
“크윽…”
무겁게 짓눌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뿌옇고 흐릿했다. 천장. 하지만 익숙한 형광등이나 벽지가 아니었다. 거친 나무 기둥과 낡은 짚으로 엮은 듯한 지붕. 어렴풋이 보이는 벽 또한 울퉁불퉁한 흙벽이었다.
‘여긴… 어디지?’
머릿속이 마치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웠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왔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통증이었다. 겨우 팔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희고 깨끗한 피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민준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느라 손가락 끝이 늘 거칠었지만, 이 손은 마치 이제 막 성인이 된 듯, 굳은살 하나 없이 여렸다.
소름이 돋았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낡은 목재 탁자 위에는 빛바랜 도자기 그릇과 흙으로 빚은 듯한 투박한 약병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거적때기 같은 이불이 구겨져 있었고, 창문이라고 불릴 만한 곳에는 얇은 기름종이가 발려 있었다. 모든 것이 낡고, 투박하고, 그리고… 이상했다.
‘꿈인가? 아니, 꿈치고는 너무 생생해.’
몸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놀랍게도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낯선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유진… 유가문의 막내… 병약한… 무공의 재능 없음…’
혼란스러웠다. 아니, 혼란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이건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자신의 이름은 김민준, 대한민국 서울에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기억은 ‘유진’이라는 다른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낡은 방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진아, 정신이 들었느냐?”
수심 가득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여인은 탁자 위의 약병을 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민준, 아니 유진을 바라봤다.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열이 심해서 밤새 앓았는데… 네 몸은 항상 이리 약해서야, 에휴.”
여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절망감 같은 것이 묻어났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알았다. 아니, ‘유진’의 기억이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여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어미다. 자, 어서 이 약이라도 마시려무나.”
도자기 잔에 따라진 뜨끈한 약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니 역한 풀뿌리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낯선 기억 속에서 ‘유진’은 늘 이 약을 마셨다. 병약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몸은 회복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복잡해졌다.
자신은 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났다.
이곳은 무림, 강호라고 불리는 세계. 무공을 익히고 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
그리고 자신은… 무공의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병약한 유가문의 막내 도련님, 유진이었다.
“아이고, 세상이 어수선하니 병약한 너는 더욱 힘들겠구나.”
어머니가 약 그릇을 치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림맹에서는 또 천하비무대회를 연다지 않더냐. 이번엔 단순한 명예 싸움이 아니래. 마교 놈들이 득세하는 시국에, 천하의 운명을 걸고 최강자를 가린다던데…”
‘천하비무대회? 마교? 천하의 운명?’
순간, 민준의 귀가 쫑긋 섰다.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죽음과 전생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겨우 받아들이려던 참에,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그를 덮쳤다.
“그래 봐야 우리 같은 작은 문파는 구경이나 하는 팔자지. 괜히 어쭙잖게 나섰다가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공기 중에 가라앉았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지금, 이 거대한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 몸은 병약하고, 무공에 재능도 없다.
‘젠장, 살아남았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잖아.’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 하지만 그 시작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죽음으로 피날레를 맞이했지만, 무림의 병약한 도련님으로서의 삶은 이제 막 프롤로그를 쓰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암담한 현실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암담한 현실 속에, 그가 늘 바라던 ‘특별함’의 실마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직감이, 아주 희미하게 그의 심장을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