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연의 비명
낡은 붓은 더 이상 먹물을 머금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시호는 묵묵히 붓대를 들어 먹물 통을 휘저었다. 고작 학생회실 바닥에 엎지른 잉크 자국 하나 때문에 일주일째 이 망할 고문서 보관실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 위대한 이름 아래 숨겨진 잡무의 양이란… 새삼 이세계 전생이 무슨 축복인가 싶었다. 차라리 전생의 평범한 직장인이 덜 힘들지 않았을까.
그의 눈길이 희미한 마법 램프 불빛 아래 먼지 쌓인 책장을 훑었다. 이곳은 학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대도서관 지하 보존고’였다. 평생 읽지도 않을 고대 서적과 금지된 마법 문서들이 잠들어 있는 곳. 학원 측의 설명으로는 ‘마법적 에너지가 불안정한 구역이라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고 했다.
“빌어먹을… 벌써 새벽 두 시잖아.”
투덜거리며 마지막 낡은 책장을 닦아내던 시호의 손이 멈칫했다. 손끝에 스치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여느 마법 기류와는 다른, 거친 전자기파처럼 찌릿한 불쾌감.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마력을 모아 감지 주문을 발동했다. 미약한 파동이 손바닥에서 퍼져나갔다.
‘…뭐지? 일반적인 마력 흐름은 아닌데.’
책장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마법 에너지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주변 공간을 왜곡시키는 듯한 느낌. 단순히 불안정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이 격렬하게 억눌려 있거나, 혹은 그 반대로 억지로 끌어내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시호를 사로잡았다. 전생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라.’ 그러나 이세계의 새로운 피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미지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책장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희미한 마력 감응이 더욱 선명해졌다. 낡은 책장 뒤로 숨겨진 벽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완벽한 은폐 마법이 걸린 벽이었다. 시호는 손바닥을 벽에 대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의 마력이 벽에 스며들자 섬세한 문양이 드러났다. 학원 마크와는 전혀 다른, 기묘하게 뒤틀린 도형들.
철컥.
낮게 깔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낡은 금속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그 틈으로 싸늘한 바람이 밀려왔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후각을 강타했다. 흙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비린 피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뒤섞인 듯한 불쾌한 향.
침을 꿀꺽 삼킨 시호는 마법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끝에 작은 광휘를 불러냈다. 푸른빛 구슬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일렁였다. 작은 빛에 의지해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좁은 통로였다. 학원의 깔끔하고 웅장한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투박하게 깎인 돌벽으로 이루어진 지하 통로.
‘이런 곳이 학원 지하에 있었다고?’
통로는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벽에는 고대 문자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학원 역사 수업에서 스쳐 들었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금지된 마법 언어들이었다. 그 문자들이 발산하는 희미한 사악한 기운이 시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빛을 비추자, 시호는 숨을 들이켰다. 흙과 먼지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뼈 조각들이었다. 작은 동물들의 것일까, 아니면…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했다. 마력 감지 역시 폭주하듯 격렬해졌다. 마치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듯, 압도적인 마력 에너지가 통로 끝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빛을 따라 나아가자, 통로는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이어졌다. 동굴 같은 형태였으나, 바닥과 벽은 인위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투명한 수정 내부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이 번갈아 깜빡였다.
‘이게… 전부 마력 결정이라고?’
그 규모에 압도되어 한 발짝 더 다가섰을 때였다. 시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정 기둥에 ‘박혀 있는’ 형체들이었다.
인간의 형상이었다.
수많은 인간의 형체가 거대한 수정 기둥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 갇혔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수정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였다. 몸은 창백하게 시들어 있었고, 눈은 공허하게 감겨 있었다. 그들의 피부 위로는 가느다란 마력 선들이 뻗어 나와 수정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정 기둥의 깜빡이는 빛은 그들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었다.
끔찍한 광경에 시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고문이고, 착취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마력을 강제로 뽑아내어 거대한 동력원으로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학원의 막대한 마력과 그 웅장한 결계가 이 지하의 참극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 살려줘…
섬뜩하리만치 희미한 목소리였다. 수정 기둥 속에 갇힌 어떤 존재가 내는 소리였다. 시호는 몸이 굳은 채로 그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그리고 한 수정 기둥 안에서, 창백한 얼굴의 소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텅 빈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시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소녀의 입술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 도망쳐…
그 순간, 거대한 지하 공간의 저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적이지만 분명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시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거대한 바위 뒤에 숨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망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학원 교수? 아니면 이 끔찍한 시설을 관리하는 또 다른 조직?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었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손은 기괴하게 길고 말라붙어 있었고, 그 손에는 낡은 가죽으로 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림자는 수정 기둥들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향했다. 로브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호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력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림자는 손에 든 책을 펼쳐 보이며,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 언어로 된 주문이었다. 시호는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이 끔찍한 마력 추출 의식을 시작하는 주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수정 기둥 속의 모든 인간 형체들이 동시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파동치던 마력 선들이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소녀의 텅 빈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시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 로브를 입은 자에게 발견될 것이었다. 발견되지 않더라도, 이 비극을 외면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이곳의 진실을 밝혀내야 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바위 뒤에 숨어, 시호는 로브를 입은 인물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시호가 숨어 있는 바위 쪽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