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시근한 숲의 심장부에 닿자, 공기는 끈적한 습기와 흙내로 가득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만이 길 잃은 유령처럼 춤췄다.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자, 이끼 낀 거대한 돌문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 문은 마치 수천 년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 섬뜩하면서도 웅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여기, 확실해?”
하준은 손에 든 낡은 양피지 지도를 조심스레 펼쳐 보였다. 희미한 잉크로 그려진 그림들은 도무지 현실과 연결되지 않는 환상 같았다. 그는 땀으로 축축한 안경을 고쳐 쓰며, 삐죽 튀어나온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도에 따르면 이곳이 바로, 천 년 전 고대 왕국 ‘엘다’가 사라진 후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다는 지하 유적의 입구였다.
“확실하고 말고. 내 육감이 틀린 적은 없었어.”
세린은 이미 돌문 앞에서 검지로 거친 문양을 더듬고 있었다. 낡아빠진 모험가 복장에 허리춤엔 정체 모를 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였다. 망설임 없는 그 모습에 하준은 늘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육감이라니. 여긴 인류의 소중한 역사 유적이야, 세린! 최소한의 고증과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고증 타령하다가 문이 먼저 썩어 문드러지겠네. 게다가 과학? 여긴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만들어진 곳이야, 하준 박사님.”
세린은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돌문을 세게 밀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접이식 삽을 꺼내 들었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삽으로 파내려는 건 아니겠지?”
하준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세린은 이미 삽 끝으로 돌문 아래 박힌 흙을 파내고 있었다. ‘크크크’ 하는 간헐적인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대의 문은 항상 어떤 물리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면, 지반 침하로 인해 일부만 파묻혔다거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이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돌문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준은 넋이 나간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떻게?”
“보통은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 답이 있지.”
세린은 으쓱하며 랜턴을 꺼내 불을 밝혔다. 좁고 깊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안에서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훅 끼쳐 나왔다. 랜턴 불빛이 닿지 않는 통로 저편은 끝없는 심연처럼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들어갈 거야?”
하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한편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 용솟음쳤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유적. 학자로서 이보다 더한 탐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설마 이 코앞에서 쫄아서 포기할 작정은 아니겠지?”
세린은 이미 한 발을 통로 안으로 들여놓은 참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흥분과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하준은 한숨을 쉬며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멨다. 어차피 이 고집 센 여자애를 말릴 수는 없을 터였다.
“좋아, 들어가자. 하지만 내 지시를 따르는 조건으로.”
“콜. 어차피 당신은 문자 해독이나 벽 그림 해석 같은 거 말고는 딱히 쓸모가 없을 테니.”
하준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문이 닫히며 숲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그들 주변은 오직 랜턴 불빛과 그들의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고립된 세계가 되었다. 바닥은 축축하고 미끄러웠으며, 천장에서는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는 이내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은 기둥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홀이었다. 기둥과 벽에는 정교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봐, 하준. 저거 봐!”
세린은 홀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을 가리켰다. 비석은 빛바랜 회색 돌로 만들어졌지만, 표면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벽화나 문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하준은 비석 앞으로 다가가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그의 눈이 글자 위를 훑자, 입술이 느리게 움직이며 알 수 없는 고대어를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몽롱한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깊은 곳의 진실은… 오직 어둠 속에서만 빛나리라…’ 그리고 ‘세 개의 별이 하나가 될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사라진 지식은 그 모습을 드러낼지니…’”
“세 개의 별? 길? 사라진 지식? 젠장, 이건 또 무슨 수수께끼야?”
세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동물 같고, 어떤 것은 기하학적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의 한 지점에 멈췄다.
“이봐, 저 위에 봐!”
세린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천장에 그려진 거대한 별자리 그림이 있었다. 그 중 세 개의 별이 다른 별들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별들이 그려진 방식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어떤 특정한 각도에서만 빛을 반사하도록 설계된 듯, 랜턴 불빛이 닿자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 세 개의 별이… 왠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하준은 세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다른 별들과는 다른 조형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고학 지식을 총동원하며 비석에 새겨진 문자들과 천장의 별자리를 번갈아 살폈다.
“음… ‘세 개의 별이 하나가 될 때’라고 했으니, 뭔가 조작이 필요한 것 같아. 이 별들이 특정 위치에 정렬되어야 하는 퍼즐일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돌려? 저건 거의 십 미터는 되는 높이에 있는데.”
세린은 발끝으로 땅을 톡톡 건드렸다. 그 순간, 비석 아래 발판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나며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안에는 손잡이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어, 이게 뭐지?”
세린이 호기심에 손잡이를 잡아당기려 하자, 하준이 그녀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았다.
“잠깐! 함부로 움직이지 마! 고대 유적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잘못 건드리면 독가스가 나오거나, 천장이 무너지거나…”
“쫄보처럼 굴지 마. 고대의 함정은 항상 경고를 남기게 되어 있어. 아무런 문양도 없잖아? 이건 단순히 문을 여는 장치일 가능성이 더 높아.”
세린은 하준의 손을 뿌리치고 손잡이를 ‘휙’ 잡아당겼다. 순간, 홀 전체가 진동하며 ‘콰과광’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준은 눈을 질끈 감았고, 세린은 불안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봐! 아무 일 없잖아.”
세린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홀 벽면에서 ‘스으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벽화들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벽화 뒤로 숨겨져 있던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안쪽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렬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었어.”
하준은 넋 나간 얼굴로 새로 열린 통로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지적 호기심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자, 다음은 저쪽인가!”
세린은 이미 열린 통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앞으로 펼쳐질 미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준은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도, 푸른빛 속에서 언뜻 보이는 거대한 문양과 기이한 형상들을 놓치지 않았다.
“저건… 대체 무슨 의미지?”
그의 중얼거림은 푸른빛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정말로, 잊혀진 고대 왕국 엘다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을까? 그리고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그들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할까? 하준은 미지의 공포와 함께, 세린의 뒷모습에서 피어나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그들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