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각된 서고, 균열 속의 힘
“아, 진짜. 이놈의 ‘고대 문명 잔해 수집 퀘스트’는 언제 끝나는 거야?”
하준은 게임 패드를 쥔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아르카나: 에테르의 노래>의 세계에 접속한 지 어언 3년. 어느새 꽤나 높은 레벨의 유저가 되어 있었지만, 이런 단순 노가다성 퀘스트는 여전히 그의 지루함을 유발했다. 물론, 이 ‘잃어버린 에테르 도서관’은 일반 유저들이 쉽게 올 수 없는 고레벨 던전의 숨겨진 구역이었지만, 퀘스트 내용은 지극히 평범한 잡템 수집이었다.
주변은 온통 검게 그을리거나 반쯤 무너져 내린 석조 건축물들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거대한 균열이 나 있어 에테르 광선이 푸른빛을 띠며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을 받아 먼지가 춤추듯 부유하는 풍경은 꽤나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웠지만, 하준의 눈에는 그저 ‘수집해야 할 잔해가 많은 곳’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거 마지막 조각만 찾으면 보상받고 뜨는 건데…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투덜거리며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시선이 닿은 곳은 거대한 석판이 부서져 반쯤 땅에 박혀 있는 잔해였다. 흔한 유적지의 풍경.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석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굵은 균열. 그 균열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아주 미세한 푸른빛이었다. 너무나 희미해서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음? 뭐야, 저건?”
그의 캐릭터, ‘강하’는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석판으로 다가갔다. 석판 주변에는 온갖 잡초와 이끼가 뒤덮여 있었고, 퀘스트 아이템으로 보이는 조각들은 없었다. 하준은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균열의 가장자리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돌의 감촉. 그리고 순간, 찌릿하는 전류 같은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미지의 마력에 감응합니다. 심층 스캔을 시작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번개처럼 떴다. 하준은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푸른빛이 그의 팔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빛줄기처럼 선명했다.
“어, 어어?! 뭐야 이거?!”
하준은 당황했지만, 몸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푸른빛은 그의 전신을 감싸고, 이내 그의 캐릭터 형상 전체를 집어삼켰다. 석판의 균열은 빛을 토해내듯 더욱 격렬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숨겨진 고대 마력의 근원 ‘에테르의 심장’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육체와 ‘에테르의 심장’이 융합을 시작합니다.]`
`[경고: 예상치 못한 마력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정신 집중!]`
“융합?! 아니, 갑자기 웬 융합이야! 야! 나 아직 퀘스트도 안 끝냈다고!”
하준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빛의 폭풍에 묻혀버렸다.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한 힘이 밀려들어 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거대한 물줄기가 갑자기 댐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고,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와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 에테르 감응자] 칭호를 획득합니다.`
`[모든 속성 저항이 15% 증가합니다.]`
`[에테르 친화도가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숨겨진 패시브 스킬 ‘에테르 공명’이 활성화됩니다.]`
`[신규 스킬 ‘원소의 발현’이 해금됩니다.]`
엄청난 양의 시스템 메시지가 팝업되었지만, 하준은 제대로 읽을 겨를도 없었다. 고통이 서서히 쾌감으로 변해가는 기묘한 감각 속에서, 그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흐읍… 하아…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몸을 감싸던 푸른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하준의 캐릭터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온몸에서는 미세한 푸른색 에테르 입자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고,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머금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에서는 마치 별빛처럼 영롱한 푸른색 마력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이게… 내 힘이라고?’
하준은 자신의 스킬 창을 열었다. 맨 아래에 새로 생긴 스킬들이 눈에 띄었다.
`[패시브] 에테르 공명 (Lv.1)`
`설명: 에테르의 심장과 융합하여 얻은 힘. 주변 에테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마력 회복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특정 조건 만족 시, 에테르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집니다.`
`[액티브] 원소의 발현 (Lv.1)`
`설명: 에테르를 응축하여 원소의 힘을 발현합니다. 현재 당신의 감응도에 따라 무작위 원소(화염, 냉기, 번개, 대지, 바람) 중 하나가 강력하게 폭발합니다. 제어 불능 위험이 있습니다.`
‘원소의 발현? 제어 불능?’
하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대 마력. 그것도 ‘에테르의 심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힘이라니. 평범한 잡템 수집 퀘스트를 하다가 이런 걸 발견할 줄이야.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원소의 발현’ 스킬 아이콘을 클릭했다.
`[스킬 ‘원소의 발현’을 사용합니다.]`
손바닥에 모였던 푸른 에테르 입자들이 갑자기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맹렬한 붉은빛으로 변하더니, 거대한 불덩이가 그의 손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콰아아앙!
불덩이는 거대한 석판 잔해를 강타했고, 육중한 돌덩이들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맹렬한 불길이 주변을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가, 이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하준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알던 ‘원소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발현된 불의 원소.
“이게 진짜… 내 힘이라고?”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평범한 게임 플레이어였던 그는, 이제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힘을 손에 넣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 힘이 과연 축복일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저주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준은 멍하니 서서, 손끝에서 아직도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푸른 에테르 입자들을 응시했다. 거대한 힘의 문이, 그의 눈앞에서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