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 맹세, 밤의 제물
폐허가 된 낡은 예배당, 차가운 돌바닥 위로 희미한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부서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마치 텅 빈 눈동자처럼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하윤은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몸 곳곳에 새겨진 끔찍한 문양들은 밤공기에 닿을 때마다 저릿한 통증을 불러왔다. 고통은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증거이자, 잊을 수 없는 배신의 상징이었다.
“지훈….”
목구멍에서 찢어질 듯한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 이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와, 과거의 찬란했던 우정에 대한 처절한 비탄이 뒤섞여 있었다. 한때 세상의 모든 비밀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믿었던 친구. 지훈은 그녀의 전부였다. 어둠의 의식에 발을 들이밀 때도, 위험한 주술을 탐닉할 때도, 늘 그녀의 옆에서 웃어주던 얼굴. 그 웃음이, 그녀의 심장을 찢어 발기는 칼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밤의 기억은 선명했다. 제단 위에 묶인 채, 하윤은 자신의 모든 힘이 맹렬하게 뽑혀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검은 천을 두른 사제들 틈에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은빛 단검이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순간, 하윤은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그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자신은 단지, 더 큰 힘을 위한 제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의 손이 피가 맺힌 문양 위를 스쳤다. 피부 속 깊이 파고든 주술은 그녀의 정수를 흡수하며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은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일깨우고 있었다. 빼앗긴 힘의 조각들이 뒤틀리고 변형되어, 지독한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네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으니… 나 또한 네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주마. 그리고… 그 끝에 네 심장을 찢어놓을 것이다.”
하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어둠에 잠식된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과거의 순수함은 없었다. 오직 피에 굶주린 복수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녀는 낡은 두루마리를 바닥에 펼쳤다. 고대 문자로 쓰인 금지된 주술서에는 인간의 심장으로 어둠의 계약을 맺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읽어 너덜너덜해진 종이 끝자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스쳤다.
며칠 밤낮을 굶주린 채, 하윤은 복수의 도구들을 모았다.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은촛대, 마른 피가 응고된 작은 단검, 그리고… 지훈의 가장 충실한 수하 중 하나였던 ‘민수’의 머리카락 한 줌. 민수는 그날 밤, 제단 옆에서 섬뜩하게 웃던 자 중 하나였다. 그의 눈빛은 하윤에게 깊은 모욕감을 안겼다.
“첫 번째 제물은… 너다, 민수.”
하윤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양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어둠을 가르고 일렁이자, 그녀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늘어났다.
***
그날 밤, 민수는 퇴근길의 으슥한 골목에서 붙잡혔다. 한적한 뒷골목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진 한기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누, 누구야?!”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민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얀 얼굴을 한 여자였다. 그녀의 머리칼은 마치 밤의 장막처럼 검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마치 저승의 문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오랜만이야, 민수.”
낯익으면서도 섬뜩한 목소리. 민수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하윤… 네가 어떻게… 살아있을 리가…”
하윤은 천천히 민수에게 다가섰다. 발걸음마다 서늘한 기운이 골목을 채웠다. 민수는 도망치려 했지만, 마치 거대한 힘에 짓눌린 듯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있을 리가 없다니. 네가 내 심장을 찢어발기는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나?”
하윤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너도 그날 밤, 지훈의 옆에서 비웃었지. 나의 고통을 보며 쾌감을 느꼈잖아. 그날의 즐거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니?”
“아니, 아니야! 난 그저 지훈 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민수는 변명하려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파묻혔다. 하윤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검붉은 빛을 띠는 것을 본 민수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에 갇혔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두지.”
하윤의 손이 민수의 얼굴로 뻗어왔다. 그의 뺨에 닿는 순간, 불에 데인 듯한 고통이 민수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크아아악!”
그의 비명과 함께, 하윤의 손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민수의 살갗을 파고들어갔고, 그의 몸에 새겨진 생명의 기운을 끈적하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민수의 피부가 마치 쭈그러든 과일처럼 말라붙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 찼고, 입은 경련하며 의미 없는 단어들을 토해냈다.
“이… 이건… 젠장…!”
그의 목소리는 점점 얇아지고 힘을 잃어갔다. 하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그것처럼 차갑고 무정했다. 민수의 몸이 끔찍하게 뒤틀렸다. 뼈마디가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하윤은 오른손을 뻗어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얇은 실처럼 뽑혀 나온 검은 기운이 민수의 가슴을 관통했다.
“이것이 너의 죄에 대한 대가다. 그리고… 지훈에게 보내는 첫 번째 경고.”
민수의 심장에서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확인한 후, 하윤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의 몸은 이제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끔찍한 잔해로 변해 있었다. 피부는 시커멓게 타버렸고, 앙상한 뼈대만이 남아 기괴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윤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옷자락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민수에 대한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기와, 지훈에 대한 복수심만이 더욱 선명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 지훈.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나 또한 너의 세계를 조각낼 것이다.”
그녀의 그림자가 달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하윤이 아니었다. 복수의 칼날이 되어, 지훈이 만들어 놓은 어둠 속으로 더욱 깊숙이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밤은 길었고, 그녀의 복수는 이제 막 첫 번째 매듭을 묶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