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의 흔적들】
잿빛 황야는 더 이상 황야가 아니었다. 뼈만 남은 나무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하늘을 긁고, 푸석한 모래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카인은 닳아빠진 후드 끝을 더 끌어내려 얼굴을 가렸다. 옆에서 리엘은 힘겹게 발을 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작은 손은 카인의 해진 옷자락을 꽉 붙들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오라버니?” 리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입술은 터지고 말라붙어 피가 배어 나왔다.
카인은 대답 대신 허리춤의 물통을 흔들어 보였다. 텅 빈 깡통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들의 마지막 물은 어제 아침에 바닥났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기온은 지옥보다 더 차갑게 변할 터였다. 어둠과 함께 찾아오는 것들은 더 이상 상상하기도 싫었다.
“조금만 더. 저기 보여?” 카인은 굳은 손가락으로 지평선 끝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거대한 고대 도시의 잔해. 한때는 번성했던 문명의 심장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무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무덤 속에는, 아직 미지의 생존 물품이나 어쩌면 안전한 은신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
리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이미 지쳐있었지만, 그 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이 카인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꺼지는 모래는 미로 같았다. 삭막한 풍경은 끝없이 이어졌고, 태양은 빠르게 서쪽으로 기울어갔다. 붉은 노을이 황야를 피처럼 물들이기 시작하자, 카인의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빨리 움직여야 해.” 그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밤이 오기 전에, 최소한 도시 벽 안으로는 들어가야 해.”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어둠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그림자들이었다. 밤의 장막 아래, 황야의 모든 생명체는 포식자와 피식자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후자였다.
갑자기, 리엘이 휘청이며 멈춰 섰다. “오라버니… 저기….”
그녀가 가리킨 곳은 그들이 지나온 길이었다. 푸석한 모래 위에, 희미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람의 발자국은 아니었다. 네 발 달린 짐승의 흔적이었으나, 그 크기와 불규칙한 형태는 카인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새로운 거야.” 카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따라오는 것 같군.”
“뭐가…?” 리엘이 겁에 질려 물었다.
“그늘짐승.” 카인은 짧게 대답했다. “밤에만 사냥하는 놈들이지.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소리 없이 다가온다.”
그늘짐승은 황야에서 가장 악명 높은 포식자 중 하나였다. 빛을 싫어하고, 어둠 속에서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놈들. 그들의 발자국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이미 녀석들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카인은 주변을 경계하며 리엘을 자신의 뒤로 바싹 끌어당겼다. 낡은 칼자루에 손이 저절로 갔다. 닳고 닳은 칼날이었지만, 그의 유일한 벗이자 마지막 보루였다.
붉은 노을은 이제 사라지고, 하늘은 빠르게 짙은 남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발자국의 윤곽은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카인의 귀에 미세한 소리가 포착되었다. 바람 소리 같기도, 낙엽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한…. 아니, 분명히 다른 소리였다. 바스락거리는, 긁히는 소리.
“뛰어!” 카인이 리엘의 손을 잡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황야의 모래는 발목을 잡았고, 폐는 터질 듯 아팠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리엘의 작고 마른 몸이 뒤쳐지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들은 그림자 속에 먹힐 것이다.
거대한 도시의 벽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멀었다.
“오라버니, 숨… 숨이…!” 리엘의 작은 손이 카인의 옷자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녀는 주저앉아 콜록거렸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리엘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동시에, 뒤에서는 이미 녀석들의 턱에서 나오는 역겨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들이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세 마리, 아니 그 이상이었다.
카인은 리엘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녀의 몸은 깃털 같았지만, 그의 어깨에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렸다.
“젠장…!” 그는 이를 갈며 다시 달렸다. 눈앞의 도시는, 이제 생존의 약속이 아니라 아득한 절망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가장 앞에 있던 그늘짐승 한 마리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카인의 등 뒤를 노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낡은 코트를 찢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살갗이 긁히는 고통이 느껴졌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허공을 갈랐고, 그늘짐승은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녀석의 눈은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났다. 섬뜩하고, 잔혹했다.
도망치는 것은 소용없었다. 놈들은 밤의 지배자였다.
카인은 리엘을 내려놓고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기게 했다. “여기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
“오라버니… 안 돼…!” 리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그늘짐승들이 사방에서 그를 에워쌌다. 놈들의 검은 형체는 어둠에 녹아들어 마치 유령 같았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카인은 칼을 고쳐 잡았다. 폐허가 된 도시의 희미한 실루엣이 그의 등 뒤에서 더욱 어둡게 드리워졌다.
하나의 그림자가 카인에게 달려들었다. 카인은 몸을 낮춰 놈의 발톱을 피하고, 그대로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칼날이 살과 뼈를 가르는 불쾌한 감촉이 손으로 전해졌다.
“크아아아악!” 그늘짐승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다른 두 마리가 그 빈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카인은 왼팔로 공격을 막아내고, 칼로 다시 한 마리의 목을 겨냥했다. 그의 움직임은 지쳐있었지만, 절박함 속에서 날카로웠다. 살을 찢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피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미 그의 왼팔에는 깊은 상처가 생겨났다.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통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눈을 부릅떴다. 리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남은 두 마리의 그늘짐승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피 냄새와 동족의 죽음이 놈들을 일시적으로 위축시킨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놈들은 다시 사냥 본능에 충실해졌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조심해…!” 리엘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덩치가 큰 그늘짐승 한 마리가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미 그의 코앞이었다. 이빨이 번뜩였다. 피할 틈도 없었다.
놈의 거대한 앞발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하게 내려찍혔다.
콰아앙!
카인의 몸이 붕 떠올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등 뒤에 낡은 배낭이 없었다면, 아마 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몇 미터를 날아가 황야 바닥에 처박혔다. 으스러지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멀리서 리엘의 절규가 들려왔다.
핏빛으로 물든 시야 속에서, 카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칼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 무기도 없었다. 그는 그늘짐승들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밤의 그림자가, 드디어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바로 그때, 도시의 잔해 쪽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황야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도시의 낡은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무너진 잔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그늘짐승들은 본능적으로 그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붉은 눈에 명백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녀석들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온몸의 털을 세우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카인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겨우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검고 거대한 형체.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크기를 훨씬 넘어섰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섬뜩한 푸른 눈.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거대한 낫의 형체.
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늘짐승들을 응시했다. 마치 밤의 주인이 어둠 속 불청객들을 질책하는 것처럼.
그늘짐승들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거대한 그림자는 카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그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카인은 다시 한번, 생존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깨달았다.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그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방금 자신을 구한 존재가, 과연 그늘짐승보다 나은 존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한 걸음, 한 걸음 카인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카인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림자가 드디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낫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구원일지, 혹은 더 큰 절망의 시작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