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운산(墨雲山)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가려 있었다. 해가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에도 이곳만큼은 뿌연 안개와 차가운 바람이 지배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 미지 속, 거대한 바위들이 기묘하게 솟아오른 자리마다 천 년 묵은 고목들이 뒤틀린 팔을 뻗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치 모든 세월을 견뎌낸 듯 묵묵히 서 있는 건물이 있었으니, 바로 ‘천검당(天劍堂)’이었다.
천검당은 평소에는 인적조차 드문 곳이었다. 무림의 고수들이 도를 닦거나, 은거한 기인들이 마지막 수행을 하는 장소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실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묵운산 초입부터 끝없이 이어진 인파는 무림 각지의 깃발과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청운(靑雲)은 그 인파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잿빛 도포 자락이 차가운 바람에 나부꼈지만, 그의 표정은 고요했다. 그는 손에 든 검을 쥐었다 펴는 대신, 그저 눈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굽이치는 능선을 따라 천검당으로 향하는 이들 모두가 무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이거나, 앞으로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흐음, 어린 친구가 이런 곳에까지 발걸음을 했군.”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청운은 고개를 돌렸다. 낡고 헤진 승복을 입은 노승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육환장(六環杖)이 묶여 있었고, 그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았다. 소림사의 최고 원로, ‘선풍대사(禪風大師)’였다. 그를 모르는 무림인은 없었다.
“대사께서도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청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경계심이 스며 있었다.
선풍대사는 껄껄 웃었다. “노승의 늙은 뼈도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곳이지만, 이번 ‘운명결투제(運命決鬪祭)’는 감히 외면할 수 없는 부름이었으니. 젊은 도련님은 어느 문파의 소속이시오?”
“따로 소속된 곳은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 왔을 뿐.”
청운의 말에 선풍대사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호기심만으로 천하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모인 이곳까지 발을 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선풍대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청운에게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깊이는 자신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천검당의 거대한 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궁주 ‘설천검(雪天劍)’이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북해빙궁의 젊은 고수들이 굳건한 자세로 따라붙었다. 반대편에서는 울긋불긋한 도포를 입은 ‘오대산 오룡문(五臺山 五龍門)’의 문주 ‘용산(龍山)’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히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겼다.
청운은 그 모든 광경을 침묵하며 지켜봤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그 거창한 명칭만큼이나, 이곳에 모인 이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청운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잘 짜인 각본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던 모든 소리가 일순간 정지했다. 천검당의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백색의 비단 도포를 입은, 위엄 있으면서도 온화한 얼굴의 남자. 그의 등장은 공기의 흐름마저 바꾸어놓는 듯했다. 무림맹주(武林盟主), ‘백무진(白武辰)’. 명실상부한 무림의 최고 권위자이자, 이번 운명결투제의 주최자였다.
백무진은 단상에 올라섰다. 그의 눈빛이 운집한 무림인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고수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청운은 맹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백무진의 얼굴에서 미묘한 긴장감과 피로를 읽어냈다. 어딘가 모르게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두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백무진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공허하게 울렸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천하의 가장 뛰어난 무인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번 운명결투제는 단순히 어느 문파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대회가 아닙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천검당 앞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천하의… 아니, 이 세상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투입니다.”
백무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멀리 묵운산 너머의 짙은 안개 속으로 향하는 듯했다.
“승자는 천하의 향방을 결정할 권한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패자는…”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패자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그의 눈빛 속에 번뜩이는 비장함이 모든 것을 짐작케 했다. 청운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결투는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정해진 결투장에서 오직 무력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것. 하지만 단 한 가지, 이번 결투제에는 특별한 제한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백무진에게 집중됐다.
“대결은 오직 ‘밤’에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해가 뜨기 전 시작하여, 해가 완전히 뜨면 종료됩니다. 그리고 결투장 밖으로 벗어나는 자는 즉시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밤에만 싸운다? 어째서?
청운의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보통 무술 대결은 낮에 진행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밤은 시야가 제한되고, 은밀한 술수가 오고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결투장 밖으로 벗어나는 자는 자격을 상실한다’는 규칙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대결이라면 굳이 이런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을까?
그 순간, 청운의 눈에 단상 아래, 백무진의 발치에 놓인 기묘한 문양이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는 천검당의 오래된 문양인 듯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 문양 속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실들이 얽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그 실들은 단상 아래의 바닥을 따라 천검당의 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저건 대체…?’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진, 마치 무언가를 가두거나 봉인하기 위한 주술 문양 같았다. 그 문양은 백무진의 옷자락에 가려져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청운의 예리한 시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첫 번째 대결은 잠시 후, 어둠이 완전히 내린 후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참가자는 저 안쪽 천검당으로 들어와 대진표를 확인해주십시오.”
백무진의 지시에 따라 무림인들이 천검당 안으로 물결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청운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묵직한 돌문이 다시 닫히자, 천검당 내부는 거대한 촛불들의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었고, 그 비석에는 한문으로 첫 대결의 대진표가 새겨져 있었다.
청운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진표의 첫 번째 이름은 ‘청운’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는…
‘혈겁문(血劫門) 문주, 혈풍마군(血風魔君).’
무림에 피바람을 몰고 온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첫 대결부터 이토록 잔혹한 상대를 배정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청운은 비석에 새겨진 붉은 글씨가 마치 피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그림자가 천검당을 뒤덮는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흉조가 드리워졌다.
천하의 운명.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대회. 과연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일까?
청운은 검자루를 잡았다. 싸늘한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운명결투제의 서막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