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뜻밖의 옆집 남자
똑, 똑, 똑.
새벽 세 시, 어둠에 잠긴 거실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니, 이제는 아예 베개로 귀까지 꾹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기어코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오래된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똑, 똑, 똑.
“젠장… 또 시작이야.”
나지막이 중얼거린 수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지난 몇 주간, 이놈의 아파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는 정도였다. 분명 침대 옆에 뒀던 리모컨이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고, 새 커피 머신은 엉뚱하게 욕실 선반에 처박혀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건망증이 심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을 넘었다.
소리가 나는 곳은 부엌이었다. 거실을 지나 부엌 문턱을 넘어서자,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아니, 빛난다기보다는… 물에 비친 달빛처럼 은은하게 흔들리는 실루엣이었다.
똑, 똑, 똑.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가자, 수아는 눈을 크게 떴다. 부엌 중앙,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애착 머그컵이었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겨우 건져온,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양이 발바닥 무늬 머그컵. 그 컵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제멋대로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컵이 싱크대 모서리에 부딪힐 때마다, 똑, 똑, 똑, 하는 소리가 났다.
“야! 너… 너 대체 누구냐?!”
수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머그컵은 아랑곳 않고 제 움직임을 계속했다. 컵 안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무늬 없는 하얀 도자기 컵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거기 안 서?! 내 머그컵이란 말이야! 비싸게 주고 샀다고!”
그녀의 절규가 무색하게, 컵은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흔들림이 거세지면서, 컵 바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분명 비어있었는데? 물방울은 점점 굵어지더니, 급기야 컵 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액체는… 회색빛이었다. 흙탕물처럼 탁하고 뿌연 액체.
오싹.
이번에는 섬뜩했다.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수아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컵이 갑자기 정지했다. 공중에 멈춰 선 채로, 안에 가득 찬 탁한 물을 흘리지도 않고 완벽하게 멈춰 있었다. 수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컵은 싱크대 바닥으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산산조각이 났다. 고양이 발바닥 무늬는 잔인하게 깨져버렸고, 회색빛 물은 사방으로 튀었다.
“악!”
비명과 함께 수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부엌 창문 너머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스쳤다. 마치 플래시를 터뜨린 것처럼. 그리고 바로 이어서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짧게 울렸다. 삑-!
“미쳤어… 미쳤어 정말…”
수아는 파편이 흩어진 부엌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벌벌 떨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건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공포였다. 대체, 이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괜찮으세요?!”
그때였다. 쿵, 쿵, 쿵, 하는 발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선 남자가 있었다.
이도윤. 어젯밤,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 온 남자. 어수선한 이삿짐 박스들 사이에서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채 컵라면을 먹으며 수아에게 인사를 건넸던 남자. 큰 눈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그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든 채 수아를 향해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비명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불은 왜 다 꺼져 있어요? 제가 실수로 전기를 내린 건 아닌데…”
그의 손전등 불빛이 부엌 바닥을 비추자, 산산조각 난 머그컵과 바닥에 흥건히 고인 회색빛 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도윤은 그것들을 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거… 대체…?”
그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수아는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은 자신과 파편들을 번갈아 보는 그의 시선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이 이상한 집 때문이에요! 누가 자꾸 장난을 쳐요! 아니, 귀신인가? 귀신이 제 머그컵을 깼어요!”
그녀는 울분에 차서 소리쳤다. 이도윤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수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귀신이… 머그컵을 깼다고요?”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의심과 함께 흥미가 섞여 있었다. 수아는 그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네! 정말이에요! 밤마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떠나고, 불이 깜빡거리고, 오늘은 제 머그컵이 공중에 떴다가… 흙탕물 같은 걸 채우더니… 퍽! 하고 깨졌다고요!”
수아는 거의 울먹이며 설명했다. 이도윤은 아무 말 없이 부엌 바닥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진지해져 있었다.
“음… 흙탕물… 그리고 아까 번쩍하는 불빛이랑 기계음… 제가 옆집에서 분명히 들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슨 측정 장비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어요.”
“카메라요? 측정 장비요? 누가 제 집에 들어와서 그런 짓을 한다고요?”
수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현관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이도윤은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 중 가장 큰 조각을 집어 들었다. 고양이 발바닥 무늬가 반쯤 남아있는 조각이었다. 그는 엄지로 그 표면을 문질렀다.
“글쎄요. 분명히 범상치 않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귀신이라고 단정하기엔… 뭔가 더 과학적인(?) 냄새가 나는데요?”
그의 말에 수아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과학 타령을 할 때가 아니었다.
“과학적이라뇨! 제정신이세요? 사람이 제 머그컵을 공중에 띄울 수는 없어요!”
“음…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가 말을 흐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이 아파트에 이사 오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아뇨! 단 한 번도요! 여기 이사 와서부터 딱 이래요!”
수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부엌 구석구석을 훑었다. 냉장고, 싱크대 상부장, 심지어 천장까지.
“아까 플래시 소리랑 기계음이 났을 때, 정확히 몇 시 몇 분이었죠?”
“새벽 세 시 정각이었어요! 제가 시계를 봤다고요!”
“세 시 정각… 특이하네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수아에게 몸을 돌렸다.
“김수아 씨.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어차피 저도 옆집이고, 저도 밤에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는 중이었거든요. 혹시… 이 현상이 옆집인 저에게까지 영향을 미 미치고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해서요.”
그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수아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큰 눈은 진심으로 호기심과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조금은 설레는 표정이기도 했다.
“도와주신다니… 뭘 어떻게…?”
“음… 일단 부엌에 떨어진 파편들을 치우고, 제가 밤에 잠시 잠복근무를 해보죠. 아니면… 제가 제 카메라로 이 상황을 한번 촬영해 볼 수도 있고요.”
카메라? 그의 말에 수아는 의아했다. 그는 전문 탐정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는데.
“촬영이라뇨? 뭐 하시는 분이세요?”
“아, 저요? 저는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입니다. 다큐멘터리나 특이한 현상을 기록하는 데 관심이 많아서요. 마침 최근에 이삿짐을 풀다가 잃어버린 장비를 찾는 중이었는데… 이 집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잃어버린 장비를 찾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이도윤은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러니까, 김수아 씨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 미스터리한 현상이… 어쩌면 제가 잃어버린 장비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죠.”
수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잃어버린 장비? 귀신이 아니라? 그리고 그게 이 모든 기괴한 현상의 원인이라고?
그때였다. 팟-!
갑자기 거실의 전등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아파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이도윤의 손전등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악! 또! 또 시작이야!”
수아는 그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공포가 다시 그녀를 덮쳐왔다. 이도윤 역시 놀란 듯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손전등을 들어 거실을 비췄다.
그리고 그 순간, 수아는 눈을 의심했다.
어둠 속, 거실 테이블 위. 분명히 아까까지는 깨끗하게 비어있던 그곳에, 이제는 자그마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닿자, 그것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깜빡 놓고 간 듯한…
아주 작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낡고 오래된 은색 스패너였다.
그리고 그 스패너는… 아주 미세하게,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수아와 이도윤은 서로를 마주봤다. 둘의 얼굴에는 동시에 똑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경악, 그리고… 조금의 흥분.
이 기괴한 폴터가이스트는, 이제 막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