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 죽인 숲
어둠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숲은 그 자체로 거대한 벽이자 동시에 끝없는 미로였다. 이진우는 제 입가를 가린 이엘라의 손에서 익숙한 풀내음을 맡았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옅게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그 어떤 별빛보다도 선명한 두 점의 불꽃. 그의 심장은 북을 치듯 격렬하게 울렸다. 차라리 저 눈빛에 불타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쉿…”
이엘라의 속삭임은 숲의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질 듯 희미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은 진우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발치 아래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숲이 가진 자연스러운 소음이 아니었다. 이진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빛줄기가 보였다. 그 빛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었다. 수색조였다.
그들의 발소리는 멀리서부터 묵직하게 다가왔다. 연합의 강화 부츠가 흙을 밟는 소리는 숲의 온갖 생명들을 침묵시켰다. 진우는 이엘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손아귀에 담긴 힘은 강인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자는 무언의 합의였다.
낮게 웅크린 채, 그들은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나아갔다. 숲은 그들에게 익숙한 은신처였지만, 동시에 이들을 가두는 감옥이기도 했다. 진우는 등 뒤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숨바꼭질에 지쳐가는 것은 분명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은 지쳐도 교대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고, 돌아갈 곳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서로뿐이었다.
나무뿌리가 얽힌 틈을 겨우 빠져나오자, 발밑에서 톡,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이진우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나뭇가지였다. 가늘고 마른 나뭇가지가 그의 발에 부러지는 소리. 그 작은 소리는 숲의 정적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그쪽이다! 움직인다!”
날카로운 외침이 숲을 갈랐다. 불빛들이 일제히 그들이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진우는 이엘라의 손목을 잡아채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엘라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숲의 어둠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경이로울 정도로 유연하고 빨랐다. 진우는 인간의 육체가 가진 한계를 매번 그녀 앞에서 깨닫곤 했다. 길게 뻗은 팔과 다리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좁은 틈새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마치 달빛 조각처럼 어둠 속에서 흩날렸다.
뒤에서는 추격조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통신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타겟 포착! 고유 에너지 반응 미약하지만 확인!”
‘고유 에너지 반응.’ 그들은 이엘라의 종족이 가진 자연과의 미묘한 교감 능력을 그렇게 불렀다. 연합에게 그녀는 연구 대상이자 위험한 변수일 뿐이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바위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숲의 한쪽 면이 그대로 깎여나간 듯한 거대한 절벽. 그곳은 숲의 심장부로 통하는 입구였고, 동시에 막다른 길이었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절벽을 올려다봤다. 절벽의 표면은 미끄러웠고,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제 어떡해…?” 진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이엘라는 절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마치 이 상황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그녀는 잡고 있던 진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절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진우는 불안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엘라! 무슨 생각이야?”
그녀는 진우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을 절벽에 짚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차갑고 단단했던 절벽의 표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돌 틈 사이에서 작고 푸른 새싹들이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빠르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새싹들은 순식간에 줄기가 되고, 이파리가 되고, 이내 굵은 덩굴이 되어 절벽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말도 안 돼…” 진우는 경악했다.
그녀의 능력은 식물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식물의 생장 주기를 극단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엘라의 능력은 그가 알고 있던 그 어떤 과학적 상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리 와, 진우.” 이엘라가 그를 불렀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가야 해.”
뒤에서 추격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탐조등이 절벽 아래 어둠을 헤집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탐색견의 짖는 소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붙잡아.” 이엘라가 말했다. 그녀는 방금 만들어낸 굵은 덩굴 중 하나를 잡고 있었다. 덩굴은 이미 그의 허벅지보다 두껍게 자라 절벽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었다.
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내민 덩굴을 잡았다. 덩굴은 축축하고 끈적했지만, 놀랍도록 단단했다. 이엘라는 먼저 덩굴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작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진우는 그녀를 따라 덩굴을 기어올랐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에, 아래를 비추던 탐조등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 저기 위에 뭔가 움직인다!”
총성이 터져 나왔다. 파공성을 내며 날아온 총알이 그들이 기어오르던 덩굴 바로 옆 절벽에 박혔다. 파편이 튀었다. 진우는 아래를 내려다볼 여유도 없이 필사적으로 위를 향해 기어올랐다.
이엘라는 이미 절벽의 중턱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좀 더, 진우!”
그때였다.
지상에서 또 다른 불빛이 어둠을 꿰뚫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 불빛은 일반적인 탐조등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묵직한 그림자가 절벽 아래에 드리워졌다. 그것은 연합의 최신예 수색 병기, ‘그림자 추적자’였다.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거대한 거미형 기계였다. 그 기계의 한가운데 달린 탐조등은 그 어떤 빛보다도 강력하게 그들을 비추었고, 그 옆에 달린 거대한 포신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맙소사…” 진우의 입에서 절망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 추적자의 포신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 육중한 기계음은 숲의 침묵을 송두리째 찢어발겼다. 이엘라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불안의 그림자가 스쳤다.
“이엘라!” 진우가 외쳤다. 그들을 향해 붉은 조준점이 박혔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절벽 중간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엘라는 망설임 없이 진우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빛은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그 어떤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은, 오직 결의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진우, 날 믿어?”
그녀의 질문에 진우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곧이어 터질 포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은 쿵, 하고 한 번 더 떨어졌다. 이엘라의 품에서, 그는 그녀의 체온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숲의 향기를 온전히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절벽을 뒤덮은 덩굴들이 그녀의 빛에 반응하듯 일렁였다.
콰아앙!
그림자 추적자의 포신에서 거대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이엘라가 온몸의 힘을 다해 절벽에 붙잡고 있던 덩굴들을 잡아당겼다. 그들의 몸이 벼랑 끝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덩굴들이 거대한 채찍처럼 숲을 향해 뻗어나갔다.
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아찔한 감각. 그리고 곧이어, 어딘가에 거칠게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온몸을 휘감는 어둠.
이것은 끝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손은 여전히 이엘라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