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강철 맹세, 어둠 속에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회색빛 하늘 아래, 광활한 산업 단지는 잿빛 악몽처럼 희미했다. 거대한 공장 건물들의 뼈대와 녹슨 파이프라인들이 번개 섬광에 순간적으로 그 거대한 그림자를 드러냈다가 이내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나 그 폭풍의 광기 아래, 더욱 짙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메카, ‘나이트폴(Nightfall)’은 흙탕물 위를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흑요석 같은 장갑은 모든 빛을 흡수하며 기체를 완벽하게 위장했다. 이십 톤이 넘는 거대한 강철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 하나하나가 유압의 속삭임처럼 조용했다.
*김진우, 너는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증오가 차가운 기계 몸체 안에서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연료였다. 놈의 목소리, 놈의 웃음, 그리고 놈이 나에게 칼을 꽂아 넣던 그 순간의 비열한 눈빛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망각은 사치였고, 용서는 배신이었다.
전방 500미터. 정찰 드론 두 기가 주기적인 스캔 패턴을 그리며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이트폴의 광학 위장 시스템이 그들의 탐지망을 간신히 피해 내고 있었지만, 더 가까이 접근하면 불가피한 교전이 벌어질 터였다.
나는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 온몸의 신경이 모이는 듯했다.
“시스템, 스텔스 펄스 준비. 파워 코어 댐핑 최소화.”
내 명령에 나이트폴의 인공지능이 즉시 반응했다. 기체 내부에 낮게 울리던 기계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마치 잠시 숨을 죽이는 거대한 맹수처럼.
드론이 나이트폴의 상공을 지나가는 찰나.
“발사.”
나이트폴의 어깨에서 미세한 전자기 펄스가 발사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드론의 탐지 장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삐이익- 하는 짧은 노이즈와 함께, 드론 두 기가 비틀거리며 잠시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다. 충분했다. 이 짧은 틈이.
나는 놈의 시설 깊숙이 숨겨진 ‘그것’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이한울,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네 오만의 원천이자, 내 복수의 첫 번째 제물이 될 것이다.
***
통제실.
이한울은 대형 홀로그램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또 드론 오작동이야? 이 빌어먹을 날씨 때문에 내 자산에 손실이라도 생기면…!”
곁에 서 있던 보안 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했다.
“송구합니다, 사령관님. 지금 바로 원인 파악 중입니다. 하지만… 보고에 따르면 외부에서 강력한 전자기 교란이 감지되었습니다.”
한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부 교란? 이 폭우 속에서? 그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놈은 자신이 가진 힘과 부를 맹신했지만, 동시에 깊은 곳에선 늘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그 불안감의 근원은 바로 나였다.
“외부 침입 가능성 염두에 두고 즉시 모든 방어 시스템 가동해! 그리고… 주변에 이상 징후는 없어? 특히… 김진우 그 자식의 흔적은?”
보안 팀장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현재까지는… 파악된 바 없습니다. 하지만 C-7 섹터에서 경보음이 울렸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전력 불안정이라고….”
콰아앙!
스크린에 비치던 C-7 섹터의 지도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한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나이트폴의 거대한 팔이 통제실 외벽을 뚫고 들어갔다. 강화 콘크리트와 강철 빔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엄청난 굉음을 냈다. 굉음에 맞춰 통제실 안의 보안병들이 일제히 레이저 소총을 발사했지만, 나이트폴의 장갑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튕겨 나가는 레이저 줄기는 허공을 가로지르며 빛무리만 남겼다.
“이게… 이게 무슨…!”
한울은 얼어붙었다. 스크린에 비친 거대한 검은색 기체의 형체. 분명했다. 김진우. 그 빌어먹을 자식이 돌아온 것이다. 살아서. 이 폭우를 뚫고.
나이트폴의 내부 모니터에는 한울의 얼굴이 또렷하게 잡혔다. 나는 조용히 마이크를 켰다.
“오랜만이다, 친구.”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한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모든 것이 뒤섞인 추악한 표정.
“김진우!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를!”
그는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읽혔다.
“네가 가장 아끼는 것부터 부숴야겠지. 그래야 네가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테니까.”
나이트폴의 한쪽 팔에 장착된 대구경 캐논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끝은 한울의 통제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에너지 코어 발전기를 향하고 있었다. 저 코어는 한울의 최신형 메카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 동력이었다. 놈의 야망이자, 내 복수의 정조준.
“안 돼! 멈춰! 당장 멈추지 못해!” 한울이 절규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처음으로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릉!
캐논 포구가 섬광을 토해냈다. 육중한 에너지탄이 통제실 내부를 가로질러 코어 발전기에 명중했다.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발전기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올랐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굉음을 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놈의 부하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며 꺼지고,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통제실 전체가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나이트폴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거두어들였다. 코어 발전기 주변은 폐허가 되었고,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받던 시설 전체가 급격히 동력을 잃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한울은 주저앉아 무너져가는 발전기를 망연히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선 공포와 함께, 광기 어린 분노가 번들거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김진우… 김진우! 내가 널 반드시…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나이트폴은 어둠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거대한 시설에서 울려 퍼지는 경보음과 혼란스러운 아우성은 진우의 귓가에는 그저 자장가처럼 들릴 뿐이었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마음속에는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복수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첫 번째 조각이었다. 놈이 가진 모든 것을 부수고, 놈의 숨통을 끊기 위한 긴 여정의 서막.
그리고 한울. 그는 이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버린 친구가,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가 되어 자신을 향해 발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