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유진은 고층 아파트 23층에 홀로 살았다. 도시의 팽창된 심장부, 빽빽한 콘크리트 숲 한가운데서 그녀의 공간은 언제나 완벽한 질서를 유지했다. 흠잡을 데 없이 정돈된 가구들, 무채색의 벽지, 각을 맞춰 놓은 책들.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던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피곤해서일 것이다. 분명히 컵받침 위에 올려두었던 커피잔이, 눈을 감았다 뜨자마자 책상 모서리 쪽으로 두어 센티미터 밀려나 있었다.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시 고개를 흔들고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며칠 후, 사건은 조금 더 분명해졌다. 거실 테이블 위, 항상 일정한 위치에 놓아두는 리모컨이 제자리를 벗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젠장.” 유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제 밤에 내가 무심코 건드렸나? 아니면 고양이라도 키우나, 이 집에? 스스로에게 황당한 질문을 던지고는 리모컨을 주워 제자리에 놓았다. 왠지 모르게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텅 빈 집 안에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그 후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잠겨있던 욕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락이 저절로 열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삐빅. 문이 열렸습니다.” 섬뜩한 기계음이 고요한 복도를 찢었다. 유진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잠금장치도 정상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유진아,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야. 스트레스 때문에 헛것이 들리는 걸 거야.”

하지만 이어지는 현상들은 단순한 스트레스나 착각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거실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종이 박스를 뜯는 듯한, 혹은 손톱으로 벽지를 긁는 듯한 소리.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면 소리는 멎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하면, 또다시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거실에 놓인 스탠드 조명이 제멋대로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 전구 스위치를 수십 번 빠르게 껐다 켜는 것처럼. 빛이 번쩍일 때마다 거실의 그림자들이 기괴한 형태로 일렁였다. 유진은 조명 스탠드를 노려봤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공허한 메아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스탠드의 전원을 뽑아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였다. 유진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유리 접시 하나가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었다. 조각들은 너무나 깔끔하게, 마치 의도적으로 깨진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미쳤어… 내가 미친 건가?”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불안이 신경을 갉아먹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이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명확한 경고였다.

친한 친구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최근의 기이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지민아, 나 좀 이상해. 집에 뭐가 있는 것 같아.”
수화기 너머의 지민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진아, 요즘 야근 많아서 피곤한 거 아니야? 신경과라도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아니면 내가 가서 같이 있어줄까?”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척했다. 유진은 지민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거부감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을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유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천장이 붕괴되는 것 같았고, 눈을 뜨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침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잠그고 잤는데.
유진은 얼어붙었다. 틈새로 보이는 거실의 어둠은 이전과는 다른, 끈적하고 깊은 불안을 품고 있었다. 문은 계속해서 열렸다. 유진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고 숨을 멈췄다.

“유진아…”
아주 작게, 하지만 선명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에서, 혹은 기억의 저편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소리.

유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뛰쳐나가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침실이 환해졌지만, 거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거실로 향했다. 불을 켜는 순간,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커피 테이블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그리고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 유리 화병이 산산조각 나고, 물이 쏟아져 카펫을 적셨다.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심장이 발작하는 것처럼 뛰었다.
“너, 너는 누구야!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때, 거실 벽에 걸려있던 가족사진 액자가 떨어져 내렸다. 유진의 어릴 적 모습과 부모님의 젊은 얼굴이 담긴 사진이었다. 액자는 바닥에 떨어져 유리가 깨지고, 사진은 그 속에서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사진 속 유진의 얼굴을 찢는 것처럼.
동시에, 등 뒤에서 차가운 공기가 확 끼쳐왔다. 마치 누군가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유진은 몸을 돌렸다. 침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턱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형체는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너무나 흐릿해서 윤곽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유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아… 혼자… 두지 마…”
속삭임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가깝게, 바로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림자가 손을 뻗는 순간, 유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은 아파트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23층 유진의 집에서 격렬한 소음과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 내용이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경찰은 결국 강제로 문을 열고 진입했다.
집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가구는 뒤집히고, 깨진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거실 카펫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벽에는 깊은 할퀸 자국들이 선명했다. 마치 맹수가 발톱으로 벽을 긁어댄 것처럼.
하지만 유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경찰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모든 방, 모든 옷장, 모든 서랍.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만, 거실 바닥에 찢어진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유진의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찢겨 있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의 얼굴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얼굴은, 유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집에는 원래 한 명만 살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누구도 찾지 못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텅 빈 아파트, 23층의 차가운 침묵만이 도시의 소란 속에서 영원히 이어졌다. 이따금씩 밤이 되면, 그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이 도시의 빌딩 숲을 떠돌 뿐이었다. “혼자… 두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