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만이, 이곳에 여전히 생명이 존재함을 알리는 유일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거대한 묘비처럼 솟아 있었고, 부서진 도로 위에는 녹슨 차량들의 앙상한 해골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유성은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발밑에 깔린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걷고 있었다.
“……없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바스러지는 먼지 소리에 묻혀버렸다. 빈 건물들의 어두운 내부를 랜턴으로 비추며 샅샅이 뒤졌지만, 이틀째 식량은커녕 쓸만한 물건 하나 찾지 못했다. 등 뒤의 낡은 배낭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텅 빈 속은 비명을 지르다 지쳐버린 지 오래였다. 손목에 찬 계기판의 숫자들은 서서히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은 에너지는 간당간당했다.
“젠장, 이대로라면…”
유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곳은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였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균열의 날’ 이후, 세계는 한순간에 뒤집혔다. 하늘이 찢어지고,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법 소녀… 그렇게 불리는 우리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도, 매일이 끝없는 생존 투쟁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를 지나,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슈퍼마켓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반들은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병과 찢겨나간 봉투들이 널려 있었다. 누군가 이미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유성은 희미한 희망을 품고 한쪽 구석에 쌓인 재고 박스들을 뒤적였다. 먼지투성이 손으로 박스를 열자, 실망스러운 빈 공간만이 드러났다.
그때였다.
삭막한 침묵을 찢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륵… 크르르륵…*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리, 혹은 뼈가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비명.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유성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흉조.’
이 폐허에 나타나는 불청객들. 그림자처럼 형태가 불분명하고,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재앙을 상징하는 듯한 괴물들. 이들은 늘 굶주려 있었고, 우리가 가진 미약한 빛을 먹어치우려 했다.
유성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깨진 선반 뒤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크르륵, 크르르르륵…*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이 보였다. 커다란 덩치, 이형의 팔다리, 그리고 끔찍하게 뒤틀린 육신. 일반적인 무기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존재.
손목의 계기판이 경고등을 붉게 깜빡였다. ‘에너지 잔량: 20%’. 한 번의 변신과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 이 정도로는… 위험하다. 하지만 이대로 숨어 있다가는 언젠가 발각될 것이다. 흉조는 인간의 기척을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젠장…”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배낭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상시를 위해 아껴두었던 작은 회복제 한 병이 배낭 안에 있었다. 그걸 꺼낼 여유는 없었다.
*콰아앙!*
숨어있던 선반이 부서지며, 흉조의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발톱이 유성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살갗이 붉게 달아올랐다.
“커헉!”
유성은 비명을 지르려다 가까스로 참으며 뒤로 굴렀다. 흉조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다시 팔을 휘둘렀다. 파괴된 건물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성은 손목의 계기판을 거칠게 눌렀다. 희미하게 빛나던 작은 보석이 순식간에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별의 아이, 유성. 여기, 별빛의 파수꾼으로 강림한다!”
목소리는 이전의 나약한 중얼거림과는 달랐다. 또렷하고 강인하며,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낡은 후드티와 청바지가 사라지고, 순백의 제복이 몸을 감쌌다. 은은한 별빛이 수놓인 듯한 치마와,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 손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쥐여졌다.
흉조는 잠시 주춤했다. 강력한 빛에 익숙지 않은 듯,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광기 어린 분노로 눈을 번뜩이며 다시 달려들었다.
“하아압!”
유성, 아니 이제는 별빛의 파수꾼. 그녀는 지팡이를 힘껏 휘둘렀다. 푸른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별빛 에너지가 거대한 파동이 되어 흉조에게 날아갔다. *크아아악!* 흉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 단단했던 육신에 별빛이 닿은 부분이 연기처럼 증발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흉조는 금세 회복했고, 더욱 거칠게 돌진해왔다. 파수꾼은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녀의 동작은 이전에 유성이 보여주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유연했다. 그녀는 지팡이로 흉조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무릎을 꿇은 괴물의 등에 올라탔다.
“사라져라, 어둠의 찌꺼기!”
파수꾼은 지팡이를 흉조의 심장부로 보이는 곳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른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흉조의 몸 안에서부터 폭발했다. *크아아아아아아!!!!* 흉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고,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주변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파수꾼은 휘청거리며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순백의 제복은 순식간에 빛을 잃고 낡은 후드티와 청바지로 되돌아왔다. 긴 머리카락은 다시 어두운 갈색으로 돌아왔고, 눈동자의 찬란한 빛도 사라졌다.
“하아… 하아…”
유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목의 계기판은 잔량 ‘5%’를 가리키고 있었다. 간신히 버틴 것이다. 쓰러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부서진 슈퍼마켓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배낭을 찾아 메고는, 흉조가 부숴버린 선반 뒤로 몸을 숨겼다. 이제는 주변을 수색할 힘조차 없었다. 식량은? 먹을 것은? 눈앞이 흐릿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런 나약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흉조와의 싸움 중에 떨어진 듯한 낡은 통조림 캔이 손에 잡혔다. 녹이 슬고 찌그러져 있었지만, 버려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유성은 손톱으로 캔을 긁어보았다.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절박한 안도감을 담고 있었다. 캔을 품에 소중히 안았다. 이것으로 하루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 피어났다.
유성은 찢어진 옷소매로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밤은 길고 위험했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오늘의 흉조를 물리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다. 캔 속에 담긴 희미한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작은 승리가, 과연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게 해줄까? 언제까지 이렇게 싸우고, 또 싸워야만 할까.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별빛 아래 유성은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팡이 대신 지쳐버린 팔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살아남을 거야.”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